[뉴스트래블=편집국] 삼척시 근덕면 장호리. 짙은 푸른빛으로 유명한 동해의 바다와, 흰 집들이 층층이 박힌 언덕이 어우러진다. 사람들은 한때 이곳을 ‘한국의 나폴리’라 불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름 뒤엔, 시간이 멈춘 어촌의 현실이 숨겨져 있다.
바다의 기억, 관광의 그림자
2000년대 초 장호항은 해양레저의 상징이었다. 투명한 물빛과 완만한 해안 덕에 스노클링 체험장이 들어섰고, 바다 위를 가르는 ‘삼척해상케이블카’는 장호항과 초곡항을 잇는 새로운 명물이 됐다. 여름이면 하루 수천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지역 상인들은 “한철만 잘 버티면 1년이 먹고산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파도는 길게 머물지 않았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장호항의 숨통을 끊었다. 거리엔 사람 대신 바람만 불었고, 숙박업소 100곳 중 절반이 문을 닫았다. 폐업한 카페의 창문에는 “임대 문의” 종이가 바래 있었다. 스노클링 장비점 주인은 “장비는 그대로인데, 손님이 사라졌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자체는 2018년부터 ‘장호항 해양관광벨트 조성사업’을 추진했지만, 예산 축소와 인근 지역 중복 사업으로 일부만 완료됐다. 결국 항구의 한쪽은 새로 단장됐고, 다른 절반은 여전히 낡은 채 남았다. 바다와 육지가 동시에 멈춰선 공간 - 장호항의 현실이다.
바다를 버릴 수 없는 사람들
장호리 주민의 절반 이상은 60세 이상이다. 삼척시 통계연보(2023)에 따르면 근덕면의 어업 종사자 중 58%가 고령층이다. 새벽 네 시, 부두 끝엔 여전히 어선 몇 척이 불을 밝힌다. 그중 한 노 어민은, 자신을 “김 선장(가명)”이라 소개했다. 그는 배에 묻은 소금을 닦으며 말했다. “옛날엔 새벽마다 배들이 줄을 섰지. 요즘은 혼자 나갈 때가 많아. 그래도 바다는 나를 먹여 살렸으니까, 끝까지 같이 가야지.”
그의 목소리엔 체념보다 자부심이 묻어났다. 망망한 동해 위로 해가 떠오를 때, 김씨는 낡은 그물에 손을 댔다. 한때 오징어로 가득 찼던 그물이 이제는 성게 몇 마리로 비어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매일같이 바다로 향한다.
아름다움의 역설
장호항은 여전히 아름답다. 물빛은 여느 관광지보다 투명하고, 바다 밑의 암초 사이로는 붉은 산호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역설처럼 작용한다. 관광객의 눈엔 ‘완성된 풍경’으로 보이지만, 주민에게는 소멸의 풍경이다. 남은 청년층은 거의 없고, 바다를 지키는 이들은 늙어가고 있다.
항구 끝의 낡은 건물엔 옛 사진들이 걸려 있다. 2005년, 활기를 띤 시장의 모습,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드는 장면, 그리고 손님들로 붐비던 포구의 풍경. 지금 그 자리엔 폐선과 풀만 자란다.
남겨진 바다, 되살아날 가능성
삼척시는 최근 ‘소규모 어촌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장호항을 포함한 5개 지역을 대상으로 기반 시설 정비와 어촌 체험형 관광을 다시 추진 중이다. 주민협의체도 만들어졌다. 장호항의 일부 청년들은 귀어귀촌 사업으로 돌아와, 카약 투어와 민박을 새로 열었다. 조용하지만, 다시 움직이려는 조짐이다.
김정수 씨는 말했다. “사람이 떠난다고 바다도 늙는 건 아니야. 우리가 버티면, 언젠간 또 누가 찾아오겠지.” 그의 시선 너머로 아침 햇살이 바다를 가르며 번졌다. 한때 잊힌 어촌, 그러나 여전히 살아 있는 바다. 장호항의 파도는 오늘도 변함없이 밀려온다 -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만 달라졌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