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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도시, 자그레브…크로아티아가 숨겨온 진짜 얼굴

[뉴스트래블=정국환 기자]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자그레브를 그냥 지나친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이나 스플리트의 해변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탓이다. 그러나 수도를 건너뛴 여행은 그 나라의 절반만 본 것과 같다. 자그레브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년이 넘는 시간이 층층이 쌓인 골목, 아직 과잉 관광에 물들지 않은 광장, 그리고 오래 앉아 있게 만드는 카페들. 지금 자그레브는, 유럽에서 가장 가성비 높은 도시 여행지 중 하나로 조용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위아래로 나뉜 도시, 두 개의 시간

 

자그레브를 이해하는 데는 지형이 도움이 된다. 도시는 크게 위아래로 나뉜다. 언덕 위의 고르니 그라드(Gornji Grad), 즉 상부 도시는 천년의 중세가 보존된 구시가지다. 자갈이 깔린 좁은 골목, 붉은 지붕들이 이어지는 풍경, 그리고 13세기 성벽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언덕 아래 도니 그라드(Donji Grad), 하부 도시는 19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산이다. 넓은 대로와 웅장한 신고딕 건물, 격조 있는 공원들이 펼쳐진다.

 

두 세계를 잇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짧다고 알려진 66미터짜리 푸니쿨라다. 단 몇 분 만에 중세와 19세기 사이를 오간다. 다만 2026년 현재 정기 유지보수로 잠시 운행이 중단된 상태이니, 방문 전 운행 여부를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상부 도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성 마르코 성당(Crkva svetog Marka)의 지붕이다. 강렬한 빨강과 파랑 타일로 뒤덮인 이 지붕에는 크로아티아·달마티아·슬라보니아의 문장과 자그레브의 문장이 모자이크처럼 새겨져 있다. 1880년 대지진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중세 고딕 양식의 정문은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른 아침, 관광객이 채 도착하기 전의 광장에서 이 지붕을 마주하는 경험은 자그레브가 건네는 첫 번째 선물이다.

 

광장에서 조금 걷다 보면 13세기에 지어진 카메니타 브라타(Kamenita Vrata), 즉 돌의 문을 지나게 된다. 도시 성벽의 마지막 흔적인 이 문 안에는 성모 마리아 그림을 모신 작은 성소가 있다. 관광객의 발길도 있지만, 조용히 촛불을 켜고 무릎을 꿇은 현지인들의 모습이 더 많다. 살아 있는 신앙의 공간이다.


도시의 위장, 그리고 유일한 박물관

 

반 옐라치치 광장(Trg bana Josipa Jelačića)은 자그레브의 지리적·사회적 중심이다. 이 광장 바로 뒤편에 선홍빛 파라솔이 줄지어 선 돌라츠 시장(Dolac Market)이 있다. 현지인들이 '도시의 위장'이라 부르는 이곳은 80년 넘는 역사를 지닌 노천 시장으로, 크로아티아 각지의 농부와 생산자들이 모여든다. 계절 채소와 과일, 수제 치즈, 갓 구운 빵의 냄새가 뒤섞이는 이곳은 정오 이전에 도착해야 좋은 것들을 만날 수 있다. 현금 지참은 필수다.

 

상부 도시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박물관이 하나 있다. 실연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기증한 이별의 유물들이 저마다의 짧은 이야기와 함께 전시된다. 잘라낸 드레스, 한쪽짜리 귀걸이, 다 쓴 향수병. 처음엔 기묘하게 웃기다가 이내 묵직해지는 이 공간은, 자그레브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님을 증명한다. 입장료는 약 10유로.

 

 

묘지를 관광지로 추천하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러나 미로고이(Mirogoj)는 예외다. 1876년 개장한 이 도시 공동묘지는 종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이 잠드는 곳이다. 웅장한 아케이드와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예배당, 반듯하게 뻗은 초록빛 길. 도심의 소음에서 벗어나 조용히 걷고 싶을 때, 이곳은 의외의 안식처가 된다.

 

하부 도시를 U자형으로 감싸는 일련의 공원과 광장, 현지인들이 '녹색 편자(Green Horseshoe)'라 부르는 공간도 놓치기 아깝다. 왕 토미슬라브 광장과 식물원, 즈리녜바츠 공원이 이어지며, 그 사이로 크로아티아 국립극장의 황색 외관과 미마라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에 설치된 기상 관측 기둥이 지금도 온도와 습도를 알려주는 즈리녜바츠 공원은 현지인들의 오랜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먹는다는 것, 자그레브의 방식으로

 

자그레브 음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진중함과 지중해의 가벼움이 대륙성 기후 속에서 발효된 결과다. 현지인들은 이를 '뷰르거(purger) 요리'라 부른다. 신선한 제철 재료를 중심으로 하며, 그 대부분은 돌라츠 시장에서 시작된다.

 

이 도시에서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이 있다면 단연 슈트루클리(Štrukli)다. 얇은 반죽에 코티지 치즈를 넣어 굽거나 삶은 이 음식은 달콤하게도 짭조름하게도 변주된다. 트러플을 넣은 버전은 또 다른 차원이다. 자그레바츠키 오드레자크(Zagrebački odrezak)는 크로아티아식 코르동 블뢰로, 겉은 바삭하고 속에는 녹은 치즈와 햄이 차 있다. 구운 칠면조와 얇은 건조 파스타 믈린치(mlinci)를 함께 내는 뿌리차 스 믈린치마(Purica s mlincima)도 이 도시만의 맛이다.

 

식당을 고르는 일에서 자그레브는 여행자를 실망시키는 경우가 드물다. 메스니츠카 거리의 스타리 피야커(Stari Fijaker)는 수십 년째 자리를 지키는 전통 식당으로, 점심 시간이면 노인, 직장인, 여행자가 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달마티아 소고기 스튜 파슈티차다를 크로아티아 레드 와인과 함께 내는 이곳은, 가격도 이야기도 모두 합리적이다. 슈트루클리 전문점 라 슈트루크(La Štruk)는 스칼린스카 거리에 있으며, 이 하나의 메뉴에만 집중하는 방식이 오히려 신뢰를 준다. 파인다이닝을 원한다면 미슐랭 스타를 받은 노엘(Noel)이 있다. 현대적인 크로아티아 요리로 구성된 테이스팅 메뉴는 150유로를 넘지만, 그에 걸맞은 경험을 제공한다.

 

커피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 한다. 자그레브 사람들에게 커피는 '빨리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앉는 행위'다. 오전 열 시, 탈치체바(Tkalčićeva) 거리의 노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고 한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도 자그레브를 여행하는 방식 중 하나다.
 

 

어디서 잠들 것인가

 

자그레브의 숙소는 선택지가 넓다. 1925년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승객을 위해 지어진 에스플라나드 호텔(Esplanade Zagreb Hotel)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상징 중 하나다. 조세핀 베이커와 엘리자베스 2세가 묵었던 아르데코 복도, 세월에도 흔들리지 않는 서비스.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아침에 슈트루클리를 먹는 것만으로도 묵을 이유가 충분하다.

 

상부 도시 안에 자리한 부티크 호텔 HOH(Boutique Hotel HOH)는 규모는 작지만 감각적인 공간으로, 테라스에서 자그레브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시작하는 아침이 이 호텔의 가장 큰 자산이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자그레브는 서유럽 주요 도시에 비해 현저히 저렴하다. 캐주얼 식당 한 끼가 10~18유로 수준이고, 중급 호텔 1박도 파리나 런던의 절반 이하인 경우가 많다.

 

언제, 얼마나

 

방문 최적기는 봄과 초가을이다. 4월에서 5월, 그리고 9월에서 10월 사이에는 날씨가 온화하고 인파도 적다. 여름도 나쁘지 않지만 해안보다 더울 수 있다. 12월의 자그레브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어드벤트 자그레브(Advent u Zagrebu)라 불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유럽 최고 수준으로 수차례 선정된 바 있으며, 도시 전체가 조명으로 물드는 이 시기의 자그레브는 여름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다.

 

주요 관광지는 하루면 둘러볼 수 있지만, 진짜 자그레브를 느끼려면 최소 3박이 필요하다. 자그레브에서 차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당일치기까지 넣는다면 4박에서 5박이 적당하다. 시내 이동은 대체로 도보로 가능하고, 트램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지금 가야 할 이유

 

자그레브는 아직 발견 전의 도시다. 두브로브니크처럼 인파에 치이지 않고, 비엔나처럼 비싸지 않으며, 그렇다고 덜 아름답지도 않다. 천년을 품은 골목, 오래된 시장의 냄새, 커피 한 잔에 한 시간을 쓰는 사람들. 이 도시는 서두르지 않는 여행자에게 가장 많은 것을 내어준다.

 

크로아티아 여행의 경유지로만 여겨왔다면, 이번엔 자그레브를 목적지로 삼아볼 것을 권한다. 이 도시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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