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정국환 기자] 크로아티아 여행자 대부분은 이스트리아(Istria)를 지나친다. 자그레브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두브로브니크로, 혹은 달마티아 해안의 섬들로 곧장 향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다. 그러나 아드리아해로 길게 뻗어나간 이 삼각형 반도에는 크로아티아의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2000년 전 로마의 원형경기장, 베네치아 공화국이 남기고 간 파스텔색 항구 마을, 세계 최고 수준의 흰 트러플, 그리고 바다와 언덕 사이를 오가며 완성된 독자적인 식탁. 이스트리아는 크로아티아이지만, 크로아티아만은 아닌 곳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와 뒤섞이며 만들어진 이 반도의 정체성은, 지금 유럽에서 가장 흥미로운 여행 목적지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남쪽에서 시작하다 … 풀라의 원형경기장
이스트리아를 남쪽에서 들어가면 풀라(Pula)가 먼저다. 도시 한복판에서 처음 원형경기장과 마주치는 순간은 예상치 못한 충격이다. 1세기에 로마인들이 지은 이 건축물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로마 원형경기장으로, 로마의 콜로세움보다 훨씬 한적하게 만날 수 있다. 외벽은 거의 온전하고, 아치 하나하나에 시간의 무게가 담겨 있다. 입장료는 10유로이며, 지하 전시실에서는 이스트리아 올리브유와 포도주 생산의 역사를 따라갈 수 있다.
풀라 원형경기장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다. 매년 여름이면 세계적인 공연이 이 돌 위에서 펼쳐진다. 2026년에는 레니 크래비츠, 스팅, 존 레전드, 닉 케이브가 공연 일정을 잡았으며, 크로아티아계 혈통의 뉴질랜드 가수 로드(Lorde)도 8월 무대에 오른다. 73회를 맞는 풀라 국제영화제(7월 9~16일)는 이 원형경기장을 야외 상영관으로 바꾼다. 다만 2026년부터 풀라 시 당국이 원형경기장 보호를 위해 공연 관람 인원을 8,000명으로 제한하는 새 규정을 도입했기 때문에, 관심 있는 행사는 미리 예매하는 것이 필수다.
경기장 외에도 풀라의 구시가지에는 로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포룸 광장의 아우구스투스 신전, 세르기우스의 개선문, 그리고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는 소형 로마 극장. 풀라는 입장료 없이 2,000년 전 로마를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다.
로비뉴 … 엽서 속 도시가 실제로 존재한다
풀라에서 북쪽으로 40분쯤 달리면 로비뉴(Rovinj)다. 처음 이 마을을 마주하면 당황스러울 정도다. 파스텔 색깔의 집들이 작은 반도 위에 층층이 쌓여 있고, 골목은 아무 방향으로나 뻗어 있으며, 항구에는 작은 어선들이 조용히 흔들린다. 베네치아를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로비뉴는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가깝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페리로 두 시간 거리다.
구시가지를 오르다 보면 성 유페미아 교회(Crkva svete Eufemije)의 바로크 종탑이 마을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18세기에 완공된 이 종탑 꼭대기에는 성인의 동상이 풍향계처럼 서 있다. 꼭대기까지 오르면 로비뉴의 지붕들과 아드리아해가 한눈에 펼쳐진다. 그리샤(Grisia) 거리는 구시가지의 중심 골목으로, 화랑과 아틀리에가 늘어서 있다. 매년 8월 둘째 주 일요일에는 1967년부터 이어져 온 야외 미술 전시회가 이 골목 전체를 갤러리로 바꾼다.
로비뉴는 사실 바다도 빼어나다. 구시가지 바로 옆 발로타(Balota) 해변은 크고 평평한 바위들이 바다로 이어지는 곳으로, 다이빙하기에도 좋고 그냥 누워 있기에도 좋다. 여름이면 구시가지 관광객이 많지만, 새벽 일찍 항구에 나오면 그날 잡은 생선을 부리는 어부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이 로비뉴의 진짜 하루다.
포레치와 비잔틴 황금빛
서해안을 따라 더 북쪽으로 가면 포레치(Poreč)다. 이 도시는 유포라시우스 대성당(Eufrazijeva bazilika) 하나로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올랐다. 6세기 비잔틴 제국이 지은 이 성당의 내부는 황금 모자이크로 가득하다. 이탈리아 라벤나의 비잔틴 예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크로아티아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성당 입장료는 소액이며, 종탑에 오르면 포레치의 로마 시대 도로망이 그대로 보존된 구시가지 전경이 드러난다.
포레치는 이스트리아에서 관광 인프라가 가장 발달한 도시이기도 하다. 2026년 봄 포레치 인근에 약 2억 유로를 투자한 발라마르 피칼(Valamar Pical) 리조트가 문을 열었다. 크로아티아 최대 규모의 관광 투자 프로젝트로 꼽히는 이 5성급 리조트는 비수기 관광을 활성화하겠다는 목표 아래 설계됐다. 편의시설의 밀도를 원하는 여행자라면 포레치를 거점으로 삼는 것도 선택지가 된다.
언덕 위의 마을들 … 이스트리아의 내륙
해안만 보고 이스트리아를 떠난다면 절반만 본 것이다. 반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이스트리아가 기다리고 있다.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이 뒤섞인 구릉지 사이로, 중세 시대 그대로 언덕 꼭대기에 얹혀 있는 마을들이 나타난다.
그 중심은 모토분(Motovun)이다. 미르나(Mirna) 강 계곡을 굽어보는 이 마을은 베네치아 시대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고, 마을 전체를 한 바퀴 걷는 성벽 산책로에서는 포도밭과 트러플 참나무숲이 펼쳐진다. 모토분은 무엇보다 트러플로 유명하다. 마을 아래 미르나 강변의 숲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흰 트러플이 난다. 매년 7월 말에는 모토분 영화제가 열려 야외 상영장에 밤새 불이 켜진다.
그로즈냔(Grožnjan)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인구가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이 마을은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 시절 폐허가 되어 가던 것을 예술가들이 들어오면서 살아났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화랑과 아틀리에가 들어서 있고, 여름이면 골목에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매년 7월 재즈 페스티벌(Jazz is Back BP Festival)이 열리며, 입장은 무료다. 파진(Pazin)은 쥘 베른이 소설 무대로 삼은 곳이다. 깊은 협곡 위에 걸터앉은 중세 성채와 그 아래 파진스카 야마(Pazinska jama) 동굴은 베른이 직접 방문한 뒤 소설 속에 묘사했다. 매년 6월 말, 쥘 베른의 날 행사 기간에는 19세기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소설 속 장면을 재현한다.
트러플과 식탁 …이스트리아의 부엌
이스트리아 음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트러플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반도의 부엌은 크로아티아 요리의 진중함, 이탈리아 요리의 섬세함, 그리고 슬라브 내륙 농촌의 소박함이 오랜 시간 뒤섞인 결과물이다.
흰 트러플은 이스트리아가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식재료다. 모토분과 부제트(Buzet) 일대 참나무숲에서 나는 이스트리아 흰 트러플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향은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흰 트러플 시즌은 9월부터 1월까지지만, 검은 트러플은 연중 내내 구할 수 있다. 트러플을 넣은 손반죽 파스타 푸지(fuži)나 플유칸치(pljukanci)는 이스트리아 내륙 어느 코노바(konoba, 전통 선술집)에서도 만날 수 있는 기본 메뉴다. 리바데(Livade) 마을의 레스토랑 지간테(Zigante)는 1999년 세계에서 가장 큰 흰 트러플(1.31킬로그램)을 발굴한 지안카를로 지간테가 운영하는 곳으로, 트러플 요리 전문점으로서는 이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명하며 미슐랭 스타를 보유하고 있다.
해안 쪽은 다른 이야기다. 로비뉴 인근 노비그라드(Novigrad)의 레스토랑 다미르 앤드 오르넬라(Damir & Ornella)는 딱 여섯 테이블짜리 작은 공간이지만, 이스트리아 최고의 해산물 식당으로 꾸준히 꼽힌다. 그날 잡힌 것만 쓴다는 원칙이 있으며, 날것의 전채와 트러플 향을 입힌 주 요리, 단순하게 구운 생선 필레가 이어지는 방식이다. 해안가의 코노바에서는 부자라(buzara) 방식으로 조리한 홍합 - 화이트 와인, 마늘, 허브로 천천히 쪄낸 - 을 꼭 먹어 봐야 한다. 어부들의 즉석 요리에서 시작된 이 음식은 이스트리아 해안 요리의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이스트리아 말바지야(Malvazija Istarska)는 연한 황금빛의 화이트 와인으로, 가벼운 산미와 섬세한 꽃 향이 특징이다. 해산물과의 궁합이 탁월하다. 적포도주로는 테란(Teran)이 있는데, 짙은 루비색에 강한 타닌이 특징이며 붉은 육류와 잘 어울린다. 모토분 인근의 코즐로비치(Kozlović) 와이너리는 크로아티아에서 손꼽히는 생산자 중 하나다.
언제, 어떻게
이스트리아는 사계절 여행이 가능한 드문 크로아티아 지역이다. 달마티아 해안의 많은 식당과 숙소가 10월이면 문을 닫는 데 비해, 이스트리아 내륙 마을들은 겨울에도 영업한다. 오히려 트러플 시즌인 가을과 겨울이 미식 여행자에게는 최적기다. 매년 10월 초부터 다섯 주 연속으로 이어지는 트러플 축제(Truffle Days)에는 트러플 사냥 체험과 시식 행사가 이어진다. 봄은 포도밭과 올리브밭이 깨어나는 시기다. 5월 중순의 이스트리아 와인 & 워크(Istria Wine & Walk)는 북부 이스트리아 부예(Buje) 인근 포도밭을 걸으며 와인을 시음하는 이벤트로, 표가 빠르게 매진되니 서둘러야 한다. 7월과 8월은 해안 마을들이 혼잡하다. 그래도 굳이 여름을 택한다면 내륙 마을을 거점으로 삼고 해안은 이른 아침에 방문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스트리아는 렌터카 없이는 온전히 여행하기 어렵다. 해안 도시들 사이에는 버스가 다니지만 내륙 마을들은 대중교통이 사실상 없다. 풀라에서 로비뉴까지 40분, 모토분까지 90분, 포레치까지 50분이다. 도로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며 고속도로 통행료는 카드로도 낼 수 있다.
물가는 서유럽에 비해 여전히 낮다. 코노바에서의 한 끼가 1인당 15~30유로, 파인다이닝은 60~100유로 이상이다. 숙소는 풀라가 로비뉴나 포레치에 비해 저렴한 편이며, 내륙 농가형 숙소(아그로투리잠)는 조용한 분위기와 진한 현지 경험을 동시에 제공한다.
이스트리아를 여행한다는 것
이스트리아는 속도를 낮추는 여행에 어울리는 곳이다. 원형경기장을 보고, 항구 마을을 걷고, 언덕 위 마을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 날 아침 트러플 사냥을 따라나서는 여정. 그 사이사이에 말바지야 한 잔이 끼어든다. 크로아티아의 다른 어떤 곳보다 여유롭고, 이탈리아의 어떤 곳보다 저렴하며, 두 나라 어디에서도 맛보기 어려운 식탁이 기다린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이 너무 붐빈다고 느꼈다면, 하바르의 해변이 너무 시끄럽다고 느꼈다면, 이스트리아는 그 대안이 아니라 목적지 그 자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