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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월드 스케치|시즌4] 한 나라, 한 장면② 미얀마 바간 평원

끝은 보이지 않고 탑은 계속 이어진다
바간은 시간을 걷는 거대한 평원이다

[뉴스트래블=박민영 기자] 한 개를 세려다 곧 포기한다. 붉은 벽돌 탑 하나를 지나면 또 하나가 나타나고, 언덕을 넘으면 다시 수십 개가 시야를 채운다.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도 첨탑이 끊기지 않는다. 지도는 길을 알려주지만 시선은 방향을 잃는다. 바간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원을 찾는 일이 큰 의미가 없다. 평원 전체가 하나의 유적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건축물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속을 걷는다.

 

이라와디강 동쪽 약 42㎢ 평원에는 오늘날 2,000여 기가 넘는 사원과 불탑이 남아 있다. 전성기에는 1만 기 안팎의 종교 건축물이 이 들판을 메웠다고 전해진다. 수백 년 동안 쌓인 신앙은 도시를 만들지 않았다. 풍경을 만들었다. 바간은 한 건물을 기억하는 여행지가 아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가늠할 수 없는 반복을 기억하는 장소다.

 

 

이 장소가 국가를 대표하는 이유

 

바간은 미얀마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다. 오히려 '대표가 없는 대표 풍경'이다. 어느 사원을 먼저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어느 길로 들어가도 결국 같은 바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평원 위의 탑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가장 높은 첨탑도, 가장 화려한 장식도 주변 풍경을 지우지 못한다. 하나는 풍경의 일부가 되고, 수천 개가 모여 국가의 얼굴이 된다. 개별 건축보다 집합이 먼저 기억되는 세계유산은 흔치 않다.

 

바간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가 거대한 사원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이라면, 바간은 방향 없이 평원을 건너며 풍경을 모으는 여행이다. 목적지보다 과정이 길고, 도착보다 이동이 오래 남는다. 그래서 미얀마는 이곳에서 거대한 왕조보다 오래 이어진 신앙으로 읽힌다. 탑 하나는 기념물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탑의 수평선은 하나의 문명이 된다.

 

이 장소가 만들어진 배경과 과정

 

11세기 중엽 바간 왕조는 미얀마 대부분을 통일하며 이곳을 정치와 종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왕은 나라의 안정을 기원하며 사원을 세웠고, 귀족과 상인, 신도들까지 탑을 보탰다. 신앙은 경쟁처럼 번졌고, 평원은 수백 년 동안 계속 채워졌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약 250년 동안 벽돌 탑은 강을 따라, 들판을 따라, 마을을 따라 확장됐다. 건립 시기는 달라도 재료와 형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붉은 벽돌과 완만한 첨탑이 반복되면서 시간의 차이는 하나의 풍경으로 흡수됐다.

 

평평한 지형도 바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높은 산이 없고 시야를 막는 숲도 드물다. 그래서 조금 높은 곳에 오르면 첨탑이 수평선 끝까지 이어진다. 건축은 높이를 경쟁하지 않았고, 대신 넓이를 선택했다. 오늘날 여행자가 감탄하는 장면은 특정 왕이 만든 작품이 아니다. 250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같은 믿음을 같은 평원에 쌓아 올린 결과다.

 

이 장소가 겪은 변화와 그 결과

 

왕조가 쇠퇴한 뒤 바간은 정치 중심지의 자리를 잃었다. 일부 사원은 버려졌고, 지진과 풍화는 벽돌을 무너뜨렸다. 특히 1975년과 2016년 강진은 많은 유적에 균열과 붕괴를 남겼다. 복원은 원형을 되살리는 데 집중됐다. 무너진 첨탑을 다시 세우는 일보다 남은 시간을 지키는 일이 우선됐다. 오늘날 바간은 화려하게 새로 만든 유적이 아니라, 오래된 흔적을 최대한 이어가는 평원으로 남아 있다.

 

관광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높은 사원 위에 올라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지만, 문화재 보호를 위해 대부분의 사원은 출입이 제한됐다. 대신 전망 언덕과 지정된 관람 지점, 전기자전거와 마차를 이용한 평원 이동이 여행의 중심이 됐다. 그 결과 여행자는 하나의 사원을 오래 바라보기보다 여러 풍경을 이어 보게 됐다. 바간은 보는 유적에서 건너는 유적으로 변했다.

 

 

오늘, 이 장소가 갖는 의미

 

바간에서는 이동 자체가 관광이다. 전기자전거를 타고 흙길을 달리다 이름 모를 탑 앞에서 멈추고, 다시 몇 분을 달리면 또 다른 사원이 나타난다. 목적지는 계속 바뀌지만 풍경은 끊어지지 않는다. 아침에는 낮은 안개 사이로 첨탑이 떠오르고, 한낮에는 붉은 벽돌이 강한 햇빛을 받아 선명해진다. 해질 무렵에는 평원 전체가 붉은 그림자로 물든다. 같은 장소인데 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도시처럼 보인다.

 

열기구가 떠오르는 계절이면 경험은 다시 달라진다. 지상에서는 탑 사이를 걷고, 하늘에서는 평원 전체를 내려다본다. 가까이에서는 벽돌이 보이고, 멀리에서는 수백 년이 하나의 풍경으로 겹친다. 바간은 오래 머무는 곳이 아니다. 오래 움직이는 곳이다. 여행자는 하루가 끝날 때 가장 인상적인 사원의 이름보다, 끝없이 이어졌던 평원의 감각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 공간이 남긴 국가의 얼굴

 

바간은 가장 크고 화려한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셀 수 없는 수많은 탑이 함께 미얀마를 설명한다. 반복은 단조롭지 않았다. 반복이 모여 압도적인 규모를 만들었다. 여행자는 평원을 걸으며 같은 풍경을 계속 보는 것 같지만, 같은 장면은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빛이 바뀌고, 그림자가 움직이고, 첨탑의 겹침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화면이 만들어진다. 바간은 건축을 보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바라보는 곳이다.

 

평원을 끝까지 달려도 마지막 탑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를 지나면 또 하나가 이어지고, 시선이 멈추면 다시 수평선 너머에서 첨탑이 솟아오른다. 이 끝없는 반복이 바간의 본질이다. 수백 년의 시간이 벽돌로 변해 아직도 평원을 메우고 있다. 미얀마는 이곳에서 거대한 기념비 하나로 자신을 말하지 않는다. 수천 개의 탑이 함께 만든 풍경으로 나라를 기억하게 한다.

 

바간은 사원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 시간이 평원이 되는 순간을 만나러 가는 곳이다. 그리고 미얀마는 그 끝없는 첨탑의 수평선 너머에서, 신앙이 풍경으로 살아남은 나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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