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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굽, 불꽃, 그리고 침묵…오르도스 초원이 건넨 하루

말발굽에서 불꽃까지, 초원이 건넨 표정들

 

[뉴스트래블=박성은 기자] 사막의 마지막 별이 채 지기도 전에, 버스는 다시 초원을 향해 달렸다. 눈을 감았다 뜨니 세상이 통째로 바뀌어 있었다. 모래언덕이 사라진 자리에, 초록이 지평선 끝까지 번져 있었다. 오르도스 대초원. 사막이 밤새 나를 흔들어 깨웠다면, 이 초원은 아침부터 조용히 나를 눕혔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고, 오후에는 곡예사들이 허공에서 균형을 겨뤘다. 해가 기울 무렵엔 붉은 비단을 두른 만찬이 차려졌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자 이번엔 불꽃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이 잦아든 자리에, 색색의 천장을 인 게르 한 채가 조용히 하루를 받아 안았다. 넓기만 한 줄 알았던 초원은, 그렇게 하루 내내 표정을 바꿔가며 나를 붙잡았다.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이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첫걸음을 뗀 순간, 숨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가로막는 것이 없었다. 산도, 건물도, 심지어 나무 한 그루도. 시선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지평선까지 곧장 내달렸고, 저 멀리 게르 몇 채는 점처럼 작아 보였다.

 

바람이 지나가면 풀이 일제히 몸을 눕혔다가 다시 일어섰다. 구름이 해를 가렸다 놓아줄 때마다 초원은 색을 바꿔 입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풍경 혼자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전날 사막에서는 모래언덕의 높낮이를 좇아 눈이 위아래로 바빴다.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자리에 서서 수평선만 오래 바라보게 됐다. 사막이 다음 장면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는 곳이었다면, 초원은 걸음을 멈춰 세우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텅 빈 광활함이야말로, 오늘 하루 펼쳐질 모든 장면을 떠받칠 무대였다.

 

 

말발굽이 초원을 찢었다—'영웅'

 

굉음이 아니라 진동으로 먼저 왔다. 말발굽이었다. 저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기마 행렬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깃발이 찢어질 듯 펄럭였고, 속도가 오를수록 관람석의 숨소리도 함께 가빠졌다.

 

이날 만난 '영웅'은 말이 곧 주인공인 공연이었다. 화면으로 수십 번 봤던 기마 장면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이 스쳐 지날 때마다 땅의 진동이 발바닥까지 전해졌고, 흙먼지는 실제로 얼굴에 와닿았다. 몽골족의 오랜 축제 나담(那达慕)에서는 경마와 씨름, 활쏘기가 대표 종목으로 꼽힌다는 설명이 문득 겹쳐 떠올랐다. 이 공연이 나담 그 자체는 아니었지만, 말과 함께 살아온 초원의 시간이 그 발굽 소리 속에 고스란히 접혀 있는 듯했다. 말은 볼거리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이 땅에서 사람과 나란히 걸어온 존재였다.

 

 

눈으로 보던 초원을, 발로 만나다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오찬 자리로 옮겨 앉았다. 초원에서의 식사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장면이었다. 오전 내내 눈으로만 담았던 이 공간을, 이번엔 음식과 사람의 온기로 다시 만났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서자 여행의 결이 바뀌었다. 이제는 바라보는 시간이 아니라 부딪히는 시간이었다. 걷고, 뛰고, 넘어질 듯 웃으며 여러 액티비티에 몸을 던졌다. 사진 한 장에 갇혀 있던 초원이, 직접 뛰어보니 거리와 바람과 지형을 가진 살아 있는 땅으로 바뀌었다. 눈으로 소비하던 풍경이 몸으로 새겨지는 순간, 기억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균형 위에서 피어난 아찔함

 

오후의 초원은 사람의 몸으로 채워졌다. 머리에 그릇을 얹은 채 외발자전거를 타고 서로 그릇을 던지고 받는 곡예사들, 거대한 바퀴 위에서 중심을 잡는 묘기, 그리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펼쳐지는 공중곡예까지—숨을 참게 만드는 순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오전의 '영웅'이 말을 통해 초원의 역사를 보여줬다면, 이번엔 온전히 사람의 균형감각이 시선을 붙들었다. 자연과 기마, 액티비티와 곡예까지—이날의 초원은 단 하나의 얼굴로 남지 않았다.

 

 

붉은 비단 아래, 초원이 사람의 자리로 바뀌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공기가 달라졌다. 낮 동안 초원을 채웠던 속도감이 잦아들고, 사람들이 한자리로 모여들었다. 상 위로 붉은 비단을 두른 채 통째로 오른 양고기 통구이가 자리의 중심을 차지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양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 잔치를 결혼식처럼 귀한 손님을 맞을 때만 벌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카메라를 들어 올리는 손끝이 잠시 조심스러워졌다.

 

음식이 오르고 음악이 흐르자 하루의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낮의 초원이 넓고 거침없었다면, 식탁 앞의 초원은 사람과 음식이 먼저 보이는 곳이었다. 결국 이 땅을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무엇을 나누어 먹고 누구와 마주 앉았느냐의 경험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번 여행을 전세기로 이끈 ㈜행복투어 박서영 대표가 붙잡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는 내몽골을 사막과 초원의 풍경만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가 아니라, 그곳에서 먹고 보고 사람을 만나고 잠들면서 현지의 시간을 함께 사는 여행지로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가 이번 여행을 준비하며 남긴 말이다.

 

"여행은 많이 보는 것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돌아오느냐가 중요하다. 내몽골은 사막과 초원만 보고 지나가기보다 그곳의 음식과 문화, 사람들의 삶을 직접 경험해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전세기를 띄운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이동에 흘려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것. 산에서 사막으로, 사막에서 다시 초원으로 이어진 이번 여정은 여러 풍경을 스치듯 찍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한 지역의 여러 얼굴을 오래 마주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불의 향연,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너지다

 

만찬이 끝나자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고, 그 어둠을 찢듯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소박한 화톳불 하나가 아니었다. 초원 한복판에 조성된 대형 무대 위로 불꽃이 치솟고 조명이 회전하며, 음악과 함성이 한데 뒤섞이는 압도적인 불의 퍼포먼스였다. 낮 동안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그 불빛을 향해 하나둘 몸을 기울였다.

 

처음엔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이들도, 불꽃이 높이 솟아오를 때마다 탄성을 뱉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초로의 동행객이 불기둥이 가장 높이 치솟은 순간 내 팔을 툭 치며 "저것 좀 봐, 살면서 이런 불은 처음이야"라고 웃었다. 리듬이 빨라지자 박수가 터졌고, 어느 순간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며 함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는 선이, 불길이 커질수록 조금씩 지워졌다.

 

이 장면이 이날 가장 오래, 가장 뜨겁게 남았다. 낮의 '영웅'이 준 속도감도, 곡예가 준 아찔함도 아닌, 낯선 이들이 불빛 아래서 함께 소리 지르고 웃던 그 몇 분이 여행의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게르 안에서, 하루의 색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불의 여운을 안고 게르로 돌아왔다. 초록으로 넘실대던 초원은 이미 어둠에 잠겼고, 게르 사이사이 불빛만 띄엄띄엄 남아 길을 밝혔다. 문을 열자 밖과는 전혀 다른 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장 가득, 붉은색과 노란색, 파란색과 초록색 천이 중심을 향해 방사형으로 퍼져 있었다. 그 위를 올려다보는데, 초원의 초록과 만찬장의 붉은 비단, 그리고 조금 전 밤하늘을 태우던 불꽃까지—하루의 색이 한꺼번에 그 천장 위로 쏟아지는 듯했다.

 

침대에 누워 하루를 되감았다. 아침엔 초원이었다. 낮엔 말발굽이었다. 오후엔 액티비티와 곡예였다. 밤엔 만찬과 불의 향연이었다. 사막의 하루가 한순간에 스케일을 드러내는 강렬함이었다면, 초원의 하루는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전모가 보이는 깊이였다. 아침엔 끝이 보이지 않던 초원이, 밤이 되자 두 팔로 안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곡예의 긴장, 불꽃의 열기가 차례로 지나간 뒤 게르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 아침엔 나를 조용히 눕혔던 이 초원이, 하루 종일 나를 흔들어 깨우다가, 밤이 되어서야 다시 나를 눕혔다. 오르도스에서 보낸 이 하루는, 초원을 '본' 하루가 아니라 초원이라는 공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시간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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