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박성은 기자]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지난 엿새 동안 몇 개의 경계를 건넜는지 손으로 꼽아보고 있었다. 산과 사막의 경계, 사막과 초원의 경계, 낮과 밤의 경계,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옛 도읍과 미래 도시의 경계, 그리고 적국과 적국 사이에 놓였던 한 여인의 경계까지. 내몽골은 지도 위에서는 하나의 색으로 칠해진 땅이지만, 그 안을 걸어보면 서로 다른 세계가 맞닿았다가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곳이었다. 이 여행에서 내가 정말로 본 것은 사막이나 초원이 아니라, 그 모든 경계가 지워지는 순간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산과 사막 사이
첫 번째 경계는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음산산맥을 넘는 버스 안에서, 바위 능선과 계곡이 겹겹이 쌓인 짙푸른 산줄기를 보고 있으면 그 너머에 사막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세 시간을 달리자 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창밖은 지평선 끝까지 모래로 뒤덮였다. 쿠부치 사막. 하나의 대륙성 기후 안에서 이토록 다른 두 풍경이 나란히 붙어 있다는 사실이, 이 여행에서 처음 마주한 경계였다.
사막이 지워지는 자리
사막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있다. 봄마다 한반도를 뒤덮는 황사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쿠부치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런데 지난 30여 년간 이어진 조림 사업으로 이 사막의 식생피복률은 크게 높아졌고, 그 나무를 심은 손 가운데는 한국 기업과 자원봉사자들의 손도 있었다고 한다. 낙타를 타고 지나던 모래언덕 아래,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의 시간이 눈에 띄지 않게 쌓여 있었던 셈이다. 사막과 초원 사이의 경계만이 아니라, 이 땅과 내가 사는 땅 사이의 경계도 이미 오래전부터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밤이 되자 그 경계는 또 한 번 흐려졌다. 야밍사 싱수 호텔의 통유리 객실에 누우니 안과 밖의 구분이 사라졌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과 사막이 같은 풍경이 됐다. 낮의 금빛 모래는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가, 밤이 되자 별빛 아래 검푸른 빛으로 가라앉았다. 하루 사이 세 번 색을 바꾸는 이 땅에서, 나는 처음으로 실내와 실외의 경계 없이 잠들었다.

흔들어 깨우다가, 다시 눕히다
사막에서의 밤을 뒤로하고 다시 버스에 오르자, 세상은 또 한 번 통째로 바뀌었다. 오르도스 대초원. 사막이 밤새 나를 흔들어 깨웠다면, 이 초원은 아침부터 조용히 나를 눕혔다—그러나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기마극 '영웅'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말이 스쳐 지날 때마다 땅의 진동이 발바닥까지 전해졌고, 화면으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흙먼지가 얼굴에 와닿았다.
해가 기울자 경계는 다시 한번 자리를 옮겼다. 붉은 비단을 두른 양고기 통구이가 상에 오르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자 초원 한복판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소박한 화톳불이 아니었다. 대형 무대 위로 불꽃이 솟구치고 조명이 회전하는 동안,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조금씩 지워졌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이들도 어느새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히며 함께 몸을 흔들고 있었다. 게르로 돌아와 색색의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 밤, 낮 동안 나를 흔들었던 초원이 다시 나를 조용히 눕혔다. 지금껏 내가 건너온 경계들은 전부 '보는 여행'과 '겪는 여행' 사이의 경계였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
이튿날 향한 칭기즈칸릉에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경계를 만났다. 13세기 세계사를 뒤흔든 몽골 제국 창시자의 실제 유해는 몽골 전통 '밀장(密葬)' 풍습에 따라 비밀리에 묻혀, 정확한 위치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은 무덤이 아니라 상징이다—죽은 지 800년이 다 되어가는 인물과, 그를 여전히 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가 놓인 자리.
붉은 바닥의 광장을 지나 대형 정문을 통과하면, 고삐를 쥔 채 초원을 굽어보는 칭기즈칸 기마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몽골 전통 가옥 '게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전 안, 흰 대리석으로 조각된 좌상 앞에서는 800년 가까이 제향을 이어온 달하트 후손들의 의식이 지금도 이어진다고 했다. 전날 밤 불꽃과 함성으로 가득했던 초원과는 완전히 다른 침묵이 그곳에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그것이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감각이었다.

옛 도읍과 미래 도시 사이
같은 날 밤, 경계는 또 한 번 자리를 옮겼다. 후허하오터 신구의 루이허 음악분수 광장. 초원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곳에서는,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는 물기둥과 그 리듬에 맞춰 빛을 내는 마천루의 미디어 파사드가 밤하늘을 채웠다. 낮에는 800년 전 인물을 기리는 능원의 침묵 속에 있었는데, 몇 시간 뒤 같은 내몽골 땅에서 첨단 조명과 음악이 만든 미래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으니 묘한 현기증이 일었다. 유목 제국의 시간과 오늘 이 도시의 시간 사이에 놓인 경계가, 하루 안에서 이렇게 가깝게 붙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낯설고도 짜릿한 순간이었다.
적국과 적국 사이에 놓인 한 사람
여정의 마지막 날 찾은 소군박물관에서는, 이 여행에서 만난 모든 경계 가운데 가장 사람의 무게가 실린 경계를 마주했다. 전한(前漢) 시절, 궁중 화가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초상화가 모나게 그려지는 바람에 흉노 땅으로 시집을 가야 했던 궁녀 왕소군. 그러나 그녀가 흉노의 군주와 맺은 화친은 이후 반세기 넘도록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켜낸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말을 탄 왕소군과 호한야선우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방 초원을 바라보는 청동상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한 사람이 국경을 걸어 넘었다는 사실 하나가, 반세기 동안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라는 더 크고 무거운 경계를 지워버린 것이다. 그 앞에 서니, 지난 며칠 동안 내가 건넜던 산과 사막, 낮과 밤, 삶과 죽음의 경계들이 전부 이 한 사람의 걸음에 비하면 사소하게 느껴졌다.

역사가 골목의 냄새로 걸어 나오다
박물관을 나서 도심 새상라오제(塞上老街)로 향하니, 2천 년 전의 이야기는 어느새 지금 이 순간의 냄새와 소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명나라 시대 세워진 옛 도성 '귀화성(归化城)'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 거리는 450년 역사를 품고 있지만, 걸어 들어가는 순간 그 역사는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려한 패루 아래로 우산을 든 사람들이 지나갔고, 골목 안쪽 좌판에서는 말린 유제품과 잘게 자른 육포 냄새가 풍겨왔다. 한 상인이 시식용 유제품 한 조각을 내 손에 쥐여주며 "맛보고 가라"는 몸짓을 했다. 새콤하면서도 고소한, 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붉은 기둥과 단청이 걸린 상점가에서는 유목민을 형상화한 청동상 주변으로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이 도성을 세운 몽골 알탄 칸(Altan Khan)의 좌상은 그 모든 소음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낮에 박물관에서 만난 것이 2천 년 전 국경의 이야기였다면, 이 골목에서 만난 것은 그 역사가 오늘도 사람들의 입과 손을 거쳐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역사와 일상 사이의 경계는, 이 골목 어디에도 선명하게 그어져 있지 않았다.

다시, 인천으로
비행기가 고도를 높이자 창밖으로 후허하오터의 불빛이 점점 작아졌다. 산과 사막의 경계, 사막과 초원의 경계, 낮과 밤의 경계,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 옛 도읍과 미래 도시의 경계, 적국과 적국 사이에 놓였던 한 사람의 경계, 그리고 역사와 오늘의 골목 사이의 경계까지—엿새 동안 나는 계속 다른 선을 넘고 있었다. 엿새 동안 신기하게도, 그 선들은 넘고 나면 대부분 흐려지거나 사라졌다. 산이라고 생각했던 곳 너머엔 사막이, 적이라고 불렸던 이들 사이엔 화친이, 800년 전 인물의 능원 곁엔 오늘 밤을 사는 도시의 불빛이 있었다.
내몽골은 초원 사진 한 장으로 요약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달라 보이는 것들이 실은 한 땅 위에서 계속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여행이라는 것도, 나와 낯선 땅 사이에 그어진 경계 하나를 슬쩍 지우고 돌아오는 일인지도 모른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나는 그 지워진 경계의 자리를 오래도록 눈에 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