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정국환 기자] 임진강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 풍경보다 먼저 시간이 보인다. 강변의 들녘을 지나고 마을길을 걸으면 수천 년 전 사람이 남긴 흔적이 나타나고, 조금 더 가면 고구려 성곽과 신라 마지막 왕의 능, 고려 왕조를 기리는 제향 공간이 차례로 이어진다. 한때 물자와 사람이 오가던 포구에는 근대사의 흔적이 남았고, 강 건너로 이어지는 풍경에는 아직도 분단의 현실이 겹쳐 있다. 경기도 DMZ 평화누리길 10코스 ‘고랑포길’은 그래서 걷는 거리보다 그 안에 쌓인 시간이 더 인상적인 길이다.
평화누리길 10코스는 연천군 장남면 장남교에서 출발해 숭의전지까지 이어진다. 경기도 공식 안내 기준 총 21km, 약 5시간 40분이 걸리는 중간 난이도의 코스다. 임진강을 따라 논밭길과 강둑, 오솔길이 이어지고 곳곳에서 주상절리와 강변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장남교에서 시작되는 오래된 시간
첫발을 내딛는 장남교 주변부터 길의 성격이 남다르다. 임진강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었고, 강을 따라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까지 다양한 흔적이 남아 있다.
강변을 따라 사미천 일대로 들어서면 풍경은 한층 한적해진다. 물길과 들판, 낮은 구릉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전쟁 당시 이 일대가 치열한 전장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의 평온한 풍경이 다르게 다가온다.
고랑포길은 이처럼 자연을 감상하며 걷다가 역사적 장소를 만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별도의 박물관을 찾지 않아도 길 자체가 하나의 역사 전시장이 되는 셈이다.
고인돌에서 고구려 성곽까지
학곡리 일대에서는 선사시대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임진강 주변에 남아 있는 고인돌과 고대 유적은 이곳이 단순한 강변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람이 모여 살았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길을 더 이어가면 풍경은 삼국시대로 넘어간다. 임진강변 절벽 위에 자리한 호로고루는 고구려가 이 일대를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곽 유적이다. 현무암을 이용해 쌓은 성벽 위에 올라서면 임진강과 주변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강은 지금은 조용하지만, 과거에는 국경과 교통로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강을 자연적인 방어선으로 활용했던 고구려의 전략적 선택을 지형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경순왕릉에 남은 천년 왕조의 마지막 장면
고랑포 일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경순왕릉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으로, 경주가 아닌 연천에 자리한 독특한 역사유적이다.
왕릉 주변은 화려하지 않다. 낮은 구릉과 숲, 조용한 길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신라의 마지막 왕이 이곳에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주변 풍경도 역사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왕릉은 오랜 세월 잊혔다가 조선 영조 23년(1747년) 관련 비석이 발견되면서 다시 존재가 확인됐다. 이후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굴곡을 겪었다. 왕조의 마지막뿐 아니라 유적 자체가 겪은 시간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번성했던 고랑포구, 사라진 포구의 기억
고랑포길의 이름이 된 고랑포구는 과거 임진강을 통한 물류와 교류의 중심지였다. 한성과 개성 사이를 오가던 물자가 임진강을 통해 이동했던 곳으로, 지금의 한적한 강변에서는 당시의 번성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랑포구 역사공원이 더욱 의미 있다. 과거 포구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을 둘러보면 사람과 물자가 오가던 옛 풍경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강은 그대로 흐르지만 포구의 역할은 사라졌다. 고랑포길에서 마주하는 가장 인상적인 시간의 변화다. 번성했던 교역지가 분단 이후 다른 모습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이 길이 단순한 역사 탐방로가 아니라 근현대사의 현장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가을이면 호로고루가 노랗게 물든다
고랑포길의 역사 여행에 계절의 풍경까지 더하고 싶다면 9월이 제격이다. 호로고루 일원에서는 오는 3일부터 6일까지 통일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해바라기밭과 호로고루를 배경으로 체험 프로그램과 농산물 직거래장터 등이 마련된다.
성곽 아래 노란 해바라기가 펼쳐지고 그 너머로 임진강이 흐르는 풍경은 고랑포길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계절의 장면이다. 전쟁과 분단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에 꽃이 피는 모습은 이 길이 가진 또 다른 의미를 보여준다.
숭의전에서 끝나는 역사 기행
긴 길의 마지막은 숭의전이다. 조선시대에 고려 왕과 공신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공간으로, 고려 왕조를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다.
장남교에서 시작해 숭의전지에 이르는 동안 시간은 구석기에서 고대와 중세를 지나 근현대까지 이어진다. 길의 끝에 도착하면 임진강을 따라 걸었던 시간이 하나의 역사 연표처럼 정리된다.
고랑포길의 매력은 거창한 시설에 있지 않다. 강을 따라 걷고, 들판을 지나고, 낮은 구릉을 오르며 오래된 유적을 하나씩 만나는 과정 자체가 여행이 된다. 특히 경기도와 연천군이 역사·자연 관광을 결합한 코스를 운영하고 있어 도보여행과 연계 관광을 함께 계획하기에도 좋다. 실제 연천군 시티투어에서도 경순왕릉·고랑포구 역사공원·호로고루를 하나의 역사·자연 코스로 묶어 운영하고 있다.
임진강은 수천 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흘렀다. 사람은 바뀌고 왕조가 사라졌으며 포구의 번성도 끝났지만 강은 여전히 길 옆을 흐른다. 그 강을 따라 천천히 걷는 동안 여행자는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축적된 시간을 만나게 된다. 고랑포길은 그래서 ‘평화를 걷는 길’인 동시에 ‘시간을 걷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