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박민영 기자] 추석 연휴에 이틀을 북한산에서 보냈다. 24일에는 대호아파트에서 출발해 족두리봉과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를 지나 승가봉까지 갔다가 다시 대호아파트로 내려왔다. 대략 5시간이 걸렸다. 이틀 뒤인 26일에는 구기동에서 산을 올랐다. 문수봉 쪽으로 올라간 뒤 의상능선을 반대 방향으로 타고 북한산성 입구까지 내려왔다. 이번에는 5시간30분이었다. 합치면 10시간30분이다.
누군가는 묻지 않을까. 그 긴 시간을 왜 산에서 보냈느냐고. 명절이면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고, 쉬어야 할 시간도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쪼개 산에 들어갔다. 특별히 정상을 정복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록을 세우려던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산행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걸었을까.
나도 그것을 알고 싶었다.
어쩌면 산에 오른 것은 답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견디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첫날, 승가봉에서 멈춘 것은 산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대호아파트에서 산으로 들어서면 서울은 생각보다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로와 건물, 자동차와 사람으로 가득했던 공간이 어느 순간 흙과 돌, 나무와 바위로 바뀐다. 그러나 북한산은 도시에서 완전히 도망치는 산이 아니다. 오히려 도시를 계속 보여준다. 능선에 올라서면 서울이 발밑에 펼쳐진다. 산에 들어왔는데 도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바라보는 위치가 달라진다.
족두리봉을 지나 향로봉으로 향하고, 다시 비봉을 향해 걷는다.
오르막에서는 생각이 줄어든다. 숨이 차기 때문이다. 발을 어디에 놓을 것인지, 다음 바위를 어떻게 넘을 것인지, 지금보다 조금 가파른 곳을 어떻게 올라갈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평소에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수많은 일들이 산에서는 잠시 뒤로 밀려난다.
그것이 산행의 묘한 힘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평소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면서 산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을 생각할 때는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산에서는 반대가 된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생각할 공간을 만들어준다.
비봉을 지나 사모바위에 이르렀고, 승가봉으로 향했다.
앞에는 더 이어지는 능선이 있었다. 더 걸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승가봉에서 돌아섰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얼마나 더 갈 것인가’가 문제였지만, 돌아서고 나니 전혀 다른 질문이 생겼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 질문에는 산행의 목적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곳으로 이동한다. 출근하고, 약속 장소로 가고, 여행을 떠나고, 집으로 돌아온다. 대부분의 이동에는 목적지가 있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이동은 설명된다. 그런데 산행은 조금 다르다. 정상에 도착했다고 해서 삶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능선을 하나 더 넘었다고 해서 내일의 일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걷는다.
승가봉에서 돌아서는 순간, 그 사실이 이상하게 선명해졌다.
이틀 뒤 다시 산에 오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24일에 산에서 내려왔으면 끝이어야 했다.
그런데 26일 다시 북한산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구기동이었다. 첫날과 다른 출발점이었다. 문수봉 쪽으로 올라간 다음 의상능선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고 북한산성 입구를 향해 내려왔다.
첫날에는 능선을 따라 갔다가 되돌아왔다면, 둘째 날에는 산을 가로질러 나왔다.
같은 북한산이지만 산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걷는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길에 방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 집에서 회사로 가는 길처럼 출발점과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산에서는 같은 길도 어느 쪽에서 걷느냐에 따라 다른 길이 된다. 올라갈 때 보았던 바위가 내려올 때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다가오고, 지나칠 때 보이지 않았던 경사가 돌아서면 앞을 막는다.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어떤 일을 겪고 있을 때는 그것이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한참 지나 뒤돌아보면 전혀 다른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같은 사건인데 방향이 바뀌면 해석이 달라진다.
그래서 둘째 날에는 산보다 방향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가고 있다고 믿는 방향은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가.
구기동에서 올라 문수봉 쪽으로 향하고, 다시 의상능선을 거꾸로 타면서 그 질문이 몇 번이고 돌아왔다.
그러나 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산은 언제나 그렇다.
300년 전에도 누군가는 이 산을 넘어갔다
의상능선을 지나 북한산성 쪽으로 내려오면서 성문과 성벽을 마주하자 산행은 조금 다른 시간으로 들어갔다.
안내판에는 북한산성이 1711년, 숙종 37년에 축성됐다고 적혀 있다.
지금의 북한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산성은 역사문화유산이고 여행의 목적지다. 사진을 찍고, 성문을 보고, 능선을 걷는다. 하지만 성이 만들어지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산은 전혀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산은 풍경이 아니라 지형이었다.
높은 곳은 전망이었지만 동시에 방어에 유리한 곳이었다. 골짜기는 아름다운 계곡이기 전에 이동의 통로였고, 능선은 산을 넘는 길인 동시에 사람과 공간을 통제하는 경계였다. 오늘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바위와 경사가 당시에는 훨씬 직접적인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걷다 보면 북한산의 시간이 갑자기 길어진다.
나는 2026년의 등산객으로 이 산을 걷고 있지만, 내가 밟는 땅은 나보다 훨씬 오래됐다. 내가 보고 있는 능선은 수백 년 전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북한산성을 축조했던 사람들도 이 지형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산이었고, 지금의 우리에게는 잠시 벗어나기 위한 산이다.
같은 산이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유로 사람을 불러들인다.
그 생각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사람이 장소를 바꾸는 것 같지만, 어쩌면 장소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도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인지 모른다.
정상보다 중요한 것은 내려오는 길에 있었다
산을 오를 때 우리는 정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높이 올라갈수록 성취가 커지고,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산행은 흔히 ‘정복’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무언가를 해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틀 동안 산을 걸으면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중요한 것은 정상에 도착하는 순간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상에 도착한 뒤 다시 내려오는 시간이 길었다. 결국 모든 산행은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가도 다시 도시로 돌아와야 한다. 정상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짧고, 산행의 대부분은 그곳을 향해 가거나 그곳에서 내려오는 데 쓰인다.
그것은 묘하게 삶과 닮아 있다.
우리는 도착을 위해 많은 시간을 쓰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시간의 대부분은 도착과 도착 사이에 있다. 목표를 이루는 순간보다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시간이 훨씬 길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긴 시간을 자꾸만 ‘과정’이라고 부르며 견뎌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산에서는 그 과정 자체가 전부다.
다음 봉우리로 가는 동안의 숨, 발바닥의 통증, 바위의 감촉, 갑자기 열린 서울의 풍경, 잠깐의 휴식,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
그것들이 산행이다.
정상은 산행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산에서는 생각을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
두 번의 산행을 끝내고도 처음의 질문에는 답하지 못했다.
왜 걸었을까.
무엇을 찾으러 갔을까.
삶에서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던 것인지, 잠시 일상을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아무런 이유 없이 걷고 싶었던 것인지도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면 그 답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모든 행동에 이유를 붙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일을 하는 이유, 돈을 쓰는 이유, 여행을 가는 이유, 사람을 만나는 이유까지 설명하려 한다. 목적이 있어야 행동이 정당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걷는 데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할까.
어떤 길은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걷기 위해 걷는 것일 수도 있다.
산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내려오면서 얻은 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대신 머릿속에서 서로 엉켜 있던 질문들이 조금씩 분리됐다. 당장 답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과 지금 답해야 하는 질문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조금 줄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모른다.
산이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 것은 아니다.
다만 산에서는 내가 평소 얼마나 많은 답을 서둘러 만들어내며 살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다음에도 북한산에 오를 것이다
24일 승가봉에서 돌아섰고, 26일 북한산성 입구로 내려왔다.
두 번의 산행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찾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정확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시 가고 싶다.
다음에는 다른 능선을 걸을 수도 있고, 같은 길을 다시 걸을 수도 있다. 날씨가 다르면 같은 북한산도 다른 산이 될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바위와 나무와 서울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같은 산을 다시 걷는다고 해서 같은 여행이 될 수는 없다.
이번에는 답을 찾으러 갔다고 생각했다.
돌아와 보니 답보다 질문이 더 또렷해졌다.
그렇다면 실패한 여행이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행이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이어야 한다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여행이 실패로 남을 것이다. 어떤 여행은 장소를 기억하게 하고, 어떤 여행은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어떤 여행은 돌아온 뒤에도 설명되지 않는 생각 하나를 남긴다.
이번 북한산은 그랬다.
왜 걸었는지 아직 모르겠다.
무엇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에 다시 오르면 무엇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굳이 서둘러 결정하지 않으려 한다.
산에서는 한 걸음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계속 걷는다.
어쩌면 사람이 산을 오르는 이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다음 길을 만나기 위해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리고 내려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뒤, 어느 날 문득 생각하는 것이다.
그날 나는 왜 그 길을 걸었을까.
아마 다음 북한산에서도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어쩌면 조금 다른 답을 얻을지도 모른다.
아니, 또 다른 질문 하나만 더 안고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