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뉴스트래블) 박민영 기자 = 새벽 5시 10분.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고작 다섯 시간 남짓한 잠이었지만, 머리는 뜻밖에 맑았다. 서둘러 아침 준비를 마친 뒤, 어제 사둔 반미와 과일로 간단히 속을 채웠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란하베이에서의 선상 투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열 명 남짓의 외국인 여행객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표정을 안고 자리를 채웠다. 국적도,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배가 선착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모든 차이는 바다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흐리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었고, 유람선과 카르스트 지형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다와 섬이 빚어낸 장대한 풍광 앞에서는 누구나 그저 순수한 관찰자가 될 뿐이었다.

◇ 배 위에서 만난 자연의 위대함
배가 출발하자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탄을 표현했다. 누군가는 혼잣말로 감정을 흘렸고, 또 다른 이는 일행과 감탄사를 주고받으며 풍경을 나눴다. 대부분은 카메라를 들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내 눈에 온전히 담기로 했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배는 마치 탐험선을 떠올리게 했고, 오랜 기다림은 어느새 벅찬 충만함으로 바뀌었다.
베트남 북부, 하롱베이의 남쪽에는 조용히 숨겨진 절경이 있다. 바로 란하베이. 하롱베이의 화려함 뒤에 가려졌지만, 이곳은 더 순수하고 고요한 자연의 품을 간직하고 있다. 하이퐁시 깟바 지역에 속한 란하베이는 약 400여 개의 섬들이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흩어져 있으며, 석회암 절벽과 열대 식생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다. 관광객이 적어 한적하고, 자연 그대로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대형 크루즈 대신 소형 보트를 타고 카약킹을 즐기거나, 맑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어촌 마을을 찾아가 현지의 삶을 체험할 수 있다. 깟바 국립공원 트레킹과 비엣하이 마을 방문은 도시의 소음을 잊게 해주는 특별한 경험이다. 란하베이는 자연과 교감하는 여행지다. 조용한 바다, 푸른 절벽, 그리고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섬들. 그 속삭임은 여행자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 바다 한복판에서의 도전과 좌절
배가 정박하자 사람들은 하나둘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예전 같았으면 아무런 주저 없이 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잠깐의 고민이 필요한 나이가 되어 있었다. 결국 1층 갑판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던졌다. 푹—하고 물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순간, “이건 아닌데… 혹시 죽는 건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다. 힘겹게 팔을 저어 섬을 향했지만, 돌아올 길이 걱정돼 다시 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멀었다. 너무 멀었다. 겨우 돌아왔을 땐 몸은 녹초가 됐고, 내 젊음이 한 줌 사라진 듯했다. 결국 2층 갑판은 포기했다. 바다는 젊은 청춘들에게 양보했고, 그들이 물속을 누비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 지나간 젊음을 조용히 아쉬워했다.
◇ 깟바섬으로 돌아온 오후, 운명의 석양
배에서 내려 깟바섬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오후 5시. 남은 시간은 캐논 포트에서 석양을 감상하는 것뿐이었다. 오토바이를 빌리려 했지만, 토요일 오후의 깟바는 이미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30분간 동네를 돌아다닌 끝에 겨우 오토바이를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잔뜩 흐린 하늘을 보니, 기대했던 석양은 아마도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캐논 포트를 향해 달렸다. 길을 헤맸다. 해는 이미 바다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오후 5시 45분, 도착했을 땐 이미 입구가 닫혀 있었다. “오늘은 아닌가 보다…”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도 마음 한켠엔 묘한 웃음이 번졌다. 실패 역시 여행의 일부,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가 될지도 모른다.
◇ 자연과 나, 그리고 여행의 묘미
오늘 하루, 나는 자연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졌다. 때로는 바다에 밀려 휘청이고, 때로는 하늘의 빛에 압도당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고 나약한지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기복—좌절과 감탄, 두려움과 용기—바로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진짜 묘미였다.

란하베이의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흔들고, 껴안고, 다시 일으켜 세운 하나의 존재였다. 물결에 몸을 맡기며 느낀 자유, 절벽 아래에서 마주한 경외, 그리고 낯선 섬에서 마주친 낯선 나 자신—그 모든 순간이 여행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이야기로 엮였다.
즐거움은 순간순간 피어났고, 아쉬움은 그 즐거움이 끝나간다는 예감 속에서 자라났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 머물고 싶었고, 더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이란 결국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란하베이는 내게 자연의 위대함을 보여준 동시에, 그 앞에서 겸손해질 줄 아는 인간의 아름다움도 일깨워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잊고 있던 나의 감정들—설렘, 두려움, 감사, 그리고 살아있다는 실감—그 모든 것을 다시금 꺼내어 안겨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