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3 (수)

  • 맑음동두천 -7.7℃
  • 맑음강릉 -3.1℃
  • 맑음서울 -5.6℃
  • 맑음대전 -4.0℃
  • 맑음대구 -0.8℃
  • 맑음울산 -0.3℃
  • 광주 -0.3℃
  • 맑음부산 1.7℃
  • 구름많음고창 -2.2℃
  • 제주 5.3℃
  • 맑음강화 -6.5℃
  • 흐림보은 -4.4℃
  • 맑음금산 -3.3℃
  • 구름많음강진군 0.8℃
  • 맑음경주시 -1.1℃
  • 맑음거제 2.2℃
기상청 제공

[NT 맛 기획] 한입의 세계 ⑳ 그리스 파스티치오…지중해가 구운 역사, 층층이 쌓인 제국의 흔적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그리스의 어느 골목 식당에 들어서면, 따끈하게 김이 솟는 오븐 앞에서 셰프가 큼지막한 틀에 칼을 넣는다. 바삭한 표면 아래로 고기와 파스타, 베샤멜 소스가 층층이 드러나는 순간, 테이블마다 기대 어린 시선이 쏠린다. 이 요리의 이름은 파스티치오(Pastitsio).

 

처음 먹어보는 사람에게는 라자냐 같기도 하고, 거대한 그라탕 같기도 하지만, 한입 베어 물면 확실히 다른 맛이 느껴진다. 그리스 특유의 계피 향이 고기의 풍미 속에서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제국이 남긴 음식의 기억을 되살린다. 전통과 식민, 지중해의 따스함이 골고루 녹아든 한 접시. 파스티치오는 그리스 가정의 평범한 일상 음식인 동시에,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미식의 시간 여행이다.

 

 

파스티치오를 이해하려면, 지중해 한가운데서 끊임없는 침입과 교류를 겪어온 그리스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이탈리아와 터키, 그리고 아랍 세계의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엮이면서, 그리스 식탁에도 다양한 요리가 흘러들어왔다. ‘파스티치오’라는 이름 자체가 이탈리아어 Pastizio에서 왔다. ‘혼합물’, 혹은 ‘뒤섞인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정형화된 요리가 아니라, 여러 기반 문화가 버무려져 정체성을 만들어낸 셈이다.

 

가장 독특한 특징은 고기 소스에 계피와 정향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향신료의 캐릭터가 분명해 처음 맛보는 이들에게는 의외다 싶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이어진 맛의 흔적이다. 단순한 파스타 미트파이가 아니라, 제국의 후추길을 타고 건너온 향이 배어 있는 음식인 것이다.

 

구성은 단순하다. 굵은 관 모양 파스타(뷔코티니나 마카로니), 토마토 없이 향신료와 함께 졸인 소고기 또는 양고기 다짐육, 그리고 윤기 흐르는 베샤멜 소스. 이 세 요소가 오븐 안에서 만나며, 부드러움과 고소함, 향신료의 포근함을 완성한다. 윗면은 치즈가 바삭하게 구워져 포크가 들어갈 때 단단한 ‘딱’ 하는 소리를 선사한다.

 

재밋는 건, 이 요리에 명확한 가족의 개성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어떤 집은 토마토를 조금 넣고, 어떤 곳은 치즈를 더하며, 또 어떤 가족은 양고기만 고집한다. 레서피가 아니라 ‘가정의 정체성’이 기준이 되는 요리. 그래서 그리스에서 파스티치오는 식당보다 가정식으로 더 사랑받는다.

 

관광객에게도 매력적인 이유는 쉽고 친숙한 조합 덕분이다. 라자냐에 익숙한 여행자라면, 파스티치오 한 접시는 낯설지 않은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향에서, 식감에서, 애프터테이스트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그리스만의 맛’이 있어 여행의 감각을 은근하게 자극한다.


파스티치오는 그리스 음식의 핵심 메시지를 잘 보여준다. 서로 다른 문화가 부딪히고 스며들며 결국은 하나의 ‘우리 것’이 된다는 것. 역사적 충돌도, 여행자의 낯섦도, 음식이라는 매개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든다. 지중해 햇살처럼 따스하고, 아크로폴리스 바람만큼 오래된 지혜가 담긴 요리.

 

여행 중 파스티치오를 만난다면, 단순한 한 끼를 넘어 그리스인의 삶과 기억을 맛보는 순간이 될 것이다. 한 입 베어 물면, 층층이 쌓인 시간의 미스터리가 천천히 풀려나간다. 오늘 그리스의 식탁은 작은 역사 박물관이다. 그리고 포크가 그 문을 여는 열쇠다.

포토·영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