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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기획] 우연한 여정 ⑤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해봤다

체크리스트는 비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가득했다

[뉴스트래블=박주연 기자] 포르투갈 포르투. 유럽 여행의 마지막 도시였다. 최민아(33) 씨는 그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날까진 완벽했다. 케이블카, 와이너리 투어, 서점, 타일 골목, 에그타르트 가게. ‘이 도시의 핵심’을 다 채운 일정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아침,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이미 햇살은 방 안으로 깊게 들어와 있었다.

 

조식당에서 커피를 천천히 세 잔 마시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다. 지도 앱을 켜봤다가 닫았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창밖을 봤다. 점심은 생략했고, 오후엔 숙소 근처 공원에 나가 벤치에 앉았다. 그게 하루의 전부였다. “이상했어요.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여행 같았어요.” 민아 씨는 말했다. “그냥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좋을 줄 몰랐어요.”

 


‘멍하니 있음’의 기술

그날 그녀는 어떤 장소에도 ‘입장’하지 않았다. 대신 풍경이 스스로 다가왔다. 공원을 산책하던 노부부, 유모차를 밀던 아빠, 바닥의 그림자를 밟으며 뛰던 아이. 그들은 관광객이 아닌, 그 도시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포르투를 떠올리면, 뭘 봤는지는 기억 안 나요. 대신 벤치에 앉아있던 감각은 또렷해요. 옆에서 눌러오던 햇빛의 온기까지요.” 사진은 없지만, 감각은 남았다. 그녀의 앨범엔 빈 공간만 있지만, 마음속엔 온전히 채워진 오후 한 장면이 자리했다.

 

관광은 채움이지만, 여행은 비움이다

요즘 여행은 경쟁처럼 느껴진다. 평점 높은 식당, 필수 코스, 인증샷 위치.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게 곧 ‘성과’가 된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담으면, 정작 자신이 비워진다.

 

심리학자 백윤화 박사는 이 현상을 ‘관광 피로(tourism fatigue)’라고 부른다. “여행지의 감각이 아닌, 타인의 감탄을 복제하는 과정이죠. 의도적인 ‘빈 하루’는 그 복제를 멈추고, 여행을 자기 것으로 돌려주는 시간입니다.”

 

계획을 멈추면, 감각이 깨어난다. 비워진 하루는 시간을 밀도 있게 만든다.

 

목적 없는 하루가 도시를 완성시킨다

최민아 씨는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 하루가 없었다면 포르투는 그냥 예쁜 도시였을 거예요. 근데 그날이 있어서, 이 도시는 ‘내가 하루종일 쉬었던 곳’으로 남았어요.” 그녀에게 포르투는 더 이상 명소의 이름이 아니다. 바람이 불던 벤치, 그늘에 앉은 자신, 그리고 아무 일정도 없는 평화. 그 기억이 도시를 완성시켰다.

 

아무것도 안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사진도 없고, 기록도 없고, SNS에 남길 흔적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의 하루는 유독 오래 남았다. 풍경보다 공기, 명소보다 햇살, 사람보다 자신이 더 또렷했다. 해외에서 느낀 ‘가만히 있음’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늘 해야 할 일, 가야 할 곳이 정해진 세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하루는 그래서 특별했다. 움직이지 않아도 세상은 흘렀고, 멈춰 서니 비로소 자신이 움직였다.

 

결국 여행의 완성은 ‘얼마나 많이 봤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머물렀는가’에 있다. 비워둔 하루가 마음을 채우고, 멈춰 있던 시간이 오히려 자신을 앞으로 밀어낸다. 돌아와서도 그날의 감각은 오래 남는다.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순간, 부서지던 햇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오후. 그 기억은 여행의 잔상처럼 남아, 평범한 날의 틈새에서 문득 되살아난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가 여행의 본질이었다. 그날은 비워진 하루였지만, 그 안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채워졌다.

 

 

※ 실재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하되, 일부 인물 및 상황은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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