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편집국]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 지금은 차가운 바다만이 출렁이는 베링해협 아래에는 과거 인류의 길이 숨 쉬고 있다. 마지막 빙하기, 바다가 물러난 자리엔 대륙과 대륙이 이어진 거대한 육지 - 베링기아(Beringia)가 있었다. 지금은 지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라진 대륙의 길’. 그 흔적을 따라 들어가면, 인류가 처음으로 대륙을 건너던 시간이 조용히 되살아난다.
얼음과 침묵 위에 남은 길의 흔적
베링해협에 서 있으면 가장 먼저 들리는 것은 파도 소리보다 바람이다. 이곳은 바람이 지형을 기억하는 드문 장소다. 바람이 먼 해역에서 불어올 때마다, 그 아래 가라앉은 옛 육지의 형태가 희미하게 떠올라온다. 지금은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 80km의 바다지만, 불과 수만 년 전,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평원이었다. 마지막 빙하기가 해수면을 120m 이상 끌어내린 덕에 드러난 땅. 그 길이 바로 베링 육교다.
위성 해저 지형 자료에서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강줄기가 구불구불 흐르다 갑자기 끊긴 곳, 과거 빙하가 자리를 비우며 만들어낸 완만한 계곡, 순록과 들소가 이동하던 툰드라의 자락. 과학자들은 이 지형을 따라 “여기엔 분명 길이 있었다”고 말한다. 바다는 이 길을 지웠지만, 지형은 완전히 잊지 않았다.
당시의 베링기아는 얼어붙은 황무지가 아니라, 거대한 ‘맘모스 스텝 생태계’의 중심지였다. 맘모스와 털코뿔소, 야생말, 북미 늑대의 조상들이 이 거대한 풀 초원에 서식했다. 인간 또한 이 땅을 단숨에 건넌 것이 아니라, 수천 년간 머물며 사냥하고 불을 피우며 살아갔다. 베링기아는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인류의 또 하나의 고향이었다.
인류가 건너간 문, 그리고 잃어버린 풍경
고고학자들은 오랫동안 인류가 어떻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는지 논쟁해왔다. 가장 유력한 해답은 계속해서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베링기아를 건넜다.” 그러나 그 건넴은 단번의 이동이 아니었다.
해안선이 위로 솟은 시기, 사람들은 극도로 건조한 스텝 지대 한가운데에서 계곡을 따라 이동하며 계절별로 캠프를 옮겼다. 혹독한 추위에도 그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안정된 사냥 환경 덕에 긴 시간 머물렀다. 최근 연구는 베링기아에 인류가 장기간 ‘정주’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지지한다. 즉, 사람들은 단순히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통과”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잃어버린 대륙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들의 발자국은 지금 대부분 바다 아래에 잠겨 있다. 하지만 빙하가 만든 계곡의 곡선, 동물들의 고행로가 남긴 지형적 패턴은 여전히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한다. 툰드라 위에 쌓인 침묵은 깊었고, 사람들은 이 침묵을 건너 다른 대륙으로 향했다. 베링기아는 인류가 이동한 ‘문’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을 품은 하나의 세계였다.
지금의 베링기아, 접근하기 어려운 경계의 땅
지금 베링기아를 직접 찾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육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링기아의 양끝 - 러시아 추코트카와 미국 알래스카 북서부 - 는 여전히 지구에서 가장 고립된 지역으로 남아 있다.
추코트카의 작은 마을들은 겨울이면 영하 40도 아래로 떨어지고, 알래스카 북부는 여름에도 길이 녹아 끊기기 일쑤다. 모기 구름이 이동 자체를 막을 정도로 밀집해 발생하는 곳도 있다. 베링해협은 안개와 해류 변화가 극심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해역 중 하나로 분류된다. 기상 조건이 나빠지면 수 분 만에 시야가 0이 되고, 조류는 바람과 반대로 흐른다.
또한 이 지역은 유픽(Yupik), 이누피아크(Inupiat), 추크치(Chukchi) 등 북극권 토착민의 생활권이다. 그들의 생존 방식은 오랜 세월 이 땅을 보존하는 방식과 연결돼 있으며, 외부인의 무분별한 접근은 통제되고 있다. 여행자에게 이곳은 지도 위의 넓은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연과 인간의 균형이 정확히 맞춰진 섬세한 생태구역이다.
베링기아를 상징하는 유적과 흔적들은 일부 학술 탐사팀만 접근할 수 있다. 이 땅은 여전히 ‘금단의 경계’다. 자연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이 품고 있는 역사적 무게가 경박한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다 아래 남은 길을 바라보는 이유
베링기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지도에서 찾을 수도 없고, 해안선을 따라 걸어볼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라진 대륙은 여전히 인류사에서 가장 깊은 질문을 던지는 장소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이 지구 위에 흩어졌는가.” 그 질문의 한 축이 바로 이곳에서 열린다.
유네스코는 러시아·미국과 함께 ‘베링기아 세계유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사라진 땅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이 상징하는 이동과 생존, 적응과 확산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시도다. 베링기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적지지만, 그 무형의 가치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바다 아래로 사라진 길은, 어쩌면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다. 혹독한 바람과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불을 지피고 발걸음을 옮겨 새로운 세계로 향했다. 베링기아는 그 조용한 발자국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우리에게 한 가지 메시지를 남긴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어떤 길을 따라 움직여왔는가 - 그리고 우리는 그 길이 사라졌을 때,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베링기아는 그 질문을 바람 속에서 묵묵히 되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