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인도 남단 아래, 지도에서는 손톱만 한 크기로 보이는 섬 하나가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를 실제로 밟는 순간, 여행자는 곧 깨닫게 된다. 이 나라는 작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너무 많은 세계가 한꺼번에 밀려든다는 것을. 야자수 그늘 아래서 마시는 차 한 잔, 정글의 습기, 사원의 종소리,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까지. 스리랑카의 여행은 ‘보는 것’보다 먼저 ‘느끼는 것’으로 시작된다.
스리랑카는 한때 ‘아는 사람만 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이 섬은 여행자들의 레이더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연과 문화, 휴식과 탐험이 분리되지 않은 나라. 이동 시간은 짧고, 경험의 밀도는 높다. 하루 안에 고대 왕국의 유적을 보고, 차밭을 지나, 인도양 해변에서 해 질 녘을 맞이할 수 있는 곳. 이 감각의 압축이 스리랑카를 특별하게 만든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8곳, ‘작은 섬에 압축된 문명’
스리랑카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8곳이나 있다. 국토 면적을 고려하면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이 섬이 품어온 문명의 두께를 보여준다. 북부 평원에서 남부 해안까지, 고대 왕국과 식민의 흔적, 종교와 생활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다. 여행자는 한 시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를 동시에 걷게 된다.
시기리야 바위 요새는 그 상징이다. 5세기 카샤파 왕이 건설한 이 거대한 암석 도시는 단순한 전망대가 아니다. 정교한 수로와 정원, 벽화와 방어 구조는 고대 스리랑카가 이미 고도의 도시 계획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밀림은 장엄하지만, 그 아래에 숨은 기술과 권력의 이야기가 더 강렬하다.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 같은 고대 수도들은 불교 문명의 뿌리를 품고 있다. 거대한 스투파와 수백 년 된 보리수는 관광용 유적이 아니라 지금도 순례가 이어지는 신앙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사진을 찍는 손보다 두 손을 모으는 현지인의 모습이 더 흔하다.
캔디의 불치사 역시 마찬가지다. 부처의 치아 사리가 봉안된 이 사원은 스리랑카 불교의 심장부다. 저녁 의식이 시작되면, 여행자는 이 나라에서 종교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리듬’임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 차밭의 나라, 스리랑카가 세계에 남긴 ‘향의 기억’
스리랑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는 ‘차’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실론 티는 이 나라의 자연과 역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누와라엘리야와 엘라를 중심으로 한 고산 지대는 연중 서늘한 기후와 안개 덕분에 차 재배에 최적의 환경을 갖췄다.
차밭 풍경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초록의 곡선은 노동과 시간이 만든 지형이다. 이곳에서 차를 따는 사람들의 손놀림, 공장에서 이어지는 발효와 건조 과정은 한 잔의 차가 얼마나 긴 여정을 거쳐 오는지를 보여준다.
실론 티는 영국 식민지 시절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며 스리랑카의 경제 구조를 바꿨다. 지금도 차 산업은 이 나라의 주요 수출 산업이자, 지역 공동체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다. 여행자는 차 공장을 둘러보며 식민의 유산과 현재의 산업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목격하게 된다.
엘라에서 누와라엘리야로 이어지는 기차 여행은 이 모든 이야기를 가장 느리게, 가장 아름답게 연결한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차밭과 계곡, 마을의 풍경은 목적지보다 여정을 기억하게 만든다. 스리랑카에서 차는 마시는 것이 아니라, 걷고 타고 바라보는 경험이 된다.
◇ 야생이 살아 있는 나라, 사파리와 고래의 거리
스리랑카는 단위 면적 대비 생물 다양성이 세계적으로 높은 나라로 꼽힌다. 열대 정글, 건조 지대, 고산 지형, 해안 생태계가 작은 섬 안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여행자는 이동 몇 시간 만에 전혀 다른 자연을 마주하게 된다.
얄라 국립공원은 스리랑카 사파리의 대표 주자다. 이곳은 세계에서 표범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코끼리와 물소, 악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풍경은 ‘동물원 없는 야생’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민네리야 국립공원에서는 계절에 따라 수백 마리의 코끼리가 한곳에 모이는 ‘그레이트 개더링’을 볼 수 있다. 이는 아시아에서도 드문 자연 현상으로, 여행자에게 단순한 관람이 아닌 생태의 흐름을 체감하게 한다.
바다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미리사와 트링코말리 앞바다에서는 계절에 따라 블루웨일과 향유고래, 돌고래를 만날 수 있다. 정글과 바다, 사파리와 해양 생태를 한 나라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스리랑카를 독보적인 여행지로 만든다.
◇ 해변과 일상, 느리게 머무는 여행의 미학
스리랑카의 해변은 휴양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갈레, 우나와투나, 미리사로 이어지는 남부 해안은 파도와 마을, 여행자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공간이다. 이곳의 해변은 고립된 리조트가 아니라, 삶과 맞닿아 있다.
아루감베이는 전 세계 서퍼들이 찾는 파도의 성지다. 성수기에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작은 마을에 모여들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느긋하다.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여행의 일부가 된다.
갈레 포트는 스리랑카 해안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다.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이 요새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의 시간이 겹쳐진 공간이다. 성벽 위를 걷다 보면 교회와 모스크, 카페와 갤러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스리랑카 해변 여행의 핵심은 ‘머무름’이다. 무엇을 더 보기보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가 여행의 중심이 된다. 파도와 마을, 사람의 리듬이 비슷한 속도로 흘러가기에, 이곳의 해변은 여행자를 앞으로 끌어당기기보다 자연스럽게 곁에 머물게 한다.
◇ 스리랑카는 아직, 너무 많이 남아 있다
스리랑카가 지금 주목받는 이유는 ‘새로운 여행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나라는 여행을 소비가 아닌 관계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보여주기보다 먼저 다가오고, 문화는 설명하기보다 체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스리랑카를 다녀온 여행자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봤는지보다, 그곳에서 어떻게 숨 쉬었는지가 더 또렷이 남았다고.
아마도 스리랑카는 앞으로 더 많은 여행자의 목록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섬이 완전히 바뀌기 전의 스리랑카는, 여전히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 여행지로 남아 있다. 풍경을 앞세워 자신을 과시하지도, 여행자에게 먼저 말을 걸어 서두르지도 않는다. 대신 잠시 멈춰 서기를 허락하고, 기다릴 줄 아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나라의 여행은 기록보다 기억으로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스리랑카 여행의 끝에 남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질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천천히, 얼마나 깊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초록의 섬은 그 질문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건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