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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5-2026 한국관광 100선 ⑥ 서울 5대 궁궐 – 경희궁

사라진 궁, 비워진 권력의 자리

[뉴스트래블=편집국] 서울 서대문과 광화문 사이, 빌딩과 도로에 둘러싸인 언덕 위에 궁 하나가 서 있다. 다른 궁궐처럼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경희궁은 묻는다. 궁궐은 얼마나 사라질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복원될 수 있는가.

 

1617년, 광해군은 새로운 궁궐 건립을 명했다. 이름은 처음에 ‘경덕궁’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은 폐허였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화재와 재건을 반복했다. 전란의 상처 속에서 왕권은 불안정했다. 경희궁은 그런 시대적 긴장 속에서 탄생한 또 하나의 왕궁이었다. 이후 인조반정과 영조 대를 거치며 이곳은 ‘이궁’으로 활용됐고, 여러 왕이 머물렀다.

 

 

경희궁은 서울 서쪽에 자리 잡았다. 동쪽의 창덕궁·창경궁, 북쪽의 경복궁과는 다른 방향이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배치가 아니라 권력의 분산을 의미했다. 전란 이후 왕실은 하나의 궁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경희궁은 위기 시대의 대안이자, 왕조의 보험과 같은 공간이었다.

 

정전인 숭정전은 단정한 규모로 서 있다. 경복궁 근정전의 장엄함이나 창덕궁 인정전의 절제와는 또 다른 표정이다. 숭정전은 권위보다 기능을 앞세운 전각에 가깝다. 이곳에서 왕은 조회를 열고 국정을 논했다. 그러나 경희궁은 처음부터 ‘대표 궁’이 아니었다. 늘 중심의 바깥에서 기능했다.

 

그 운명은 근대에 들어 더욱 극적으로 바뀐다.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가장 혹독하게 훼손된 궁궐이 되었다. 전각 대부분이 철거됐고, 그 자리에 학교와 관공서가 들어섰다. 궁궐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다른 궁들이 상징을 일부나마 지켜냈다면, 경희궁은 존재 자체가 지워진 셈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복원은 더디게 진행됐다. 터를 되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도심 한복판, 이미 다른 시설이 자리 잡은 공간에서 궁궐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었다.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현재의 숭정전과 자정전 등 주요 전각은 복원된 건물들이다. 완전한 원형이라기보다, 자료와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된 모습이다.

 

그래서 경희궁은 다른 궁과 다른 감정을 남긴다. 웅장함보다 공백이 먼저 다가온다. 넓은 마당과 비교적 단출한 전각 배치는 오히려 ‘사라진 시간’을 환기한다. 이곳에서는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지워졌는지를 상상하게 된다.

 

 

경희궁의 언덕에 서면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빌딩 숲과 도로, 자동차 소리와 현대식 건물들. 그 사이에서 복원된 전각은 다소 고립된 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고립감이야말로 이 궁의 현재적 의미다. 경희궁은 과거의 완결된 유산이 아니라, 단절과 복원의 과정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조선 왕조는 다섯 개의 궁궐을 통해 권력을 운영했다. 경복궁이 법궁이었고, 창덕궁이 실질적 중심이었으며, 창경궁이 왕실의 생활을 품었고, 덕수궁이 제국의 꿈을 담았다면, 경희궁은 위기 속에서 기능한 또 하나의 축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기도 했다.

 

궁궐은 단지 건물이 아니다. 권력의 상징이고, 국가의 얼굴이다. 경희궁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단순한 건축물의 훼손이 아니라, 한 시대 기억의 삭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의 복원은 그 삭제에 대한 응답이다.

 

경희궁은 여전히 비어 있는 부분이 많다. 모든 전각이 되살아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었는가. 복원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서울의 다섯 궁궐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가장 넓은 여백을 가진 궁.
경희궁은 화려하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빈자리로 이야기한다.

 

권력이 머물렀던 자리, 그리고 권력이 사라진 자리.

경희궁은 그 사이에서, 지워진 시간을 다시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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