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박주연 기자] “여기가 그렇게 유명한 곳이야?” 김나연(31) 씨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유명 뷰포인트에서 그 말을 삼켰다. 붉은 지붕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펼쳐진 자리. 수많은 여행 블로그와 영상이 ‘꼭 가봐야 할 포토존’이라 소개한 명소였다.
별점 4.8, 수백 개의 후기, 드론으로 담긴 풍경 - 그 모든 찬사만큼, 사람도 많았다. “풍경은 멋있었어요. 근데 다들 사진 찍으려고 줄 서 있고, 드론이 머리 위로 세 대나 날아다녔어요. 감탄보다 ‘밀려서 서 있는 기분’이 더 컸죠.”
그녀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 풍경이 아닌 풍경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됐다. 그리고 이내, 붐비는 길을 내려왔다.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 풍경이 달라졌다
돌아오는 길, 그녀는 발길을 옆으로 돌렸다. 지도엔 ‘인기 카페’가 떠 있었지만 이번엔 굳이 다른 길로 들어섰다. 낙엽이 깔린 돌길, 담장은 오래된 회색빛이었다. 그리고 입구도 제대로 없는 작은 문 앞에 화분 네 개와 종이 간판이 놓여 있었다.
“커피 말고도 괜찮은 하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문장에 이끌려 문을 열자, 안에는 책과 레코드, 오래된 소파가 뒤섞인 낡은 공간이 있었다. 노인이 커피를 내렸고, 손님은 단 두 명. 창밖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없음’이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기대하지 않은 순간이 오래 남는다
관광지에서의 기대는 이미 포화된 감정이다. 정보가 많을수록 상상은 부풀고, 그만큼 실망도 쉬워진다. 한 관광심리학자는 말한다. “기대가 크면 비교가 생기고, 그 비교는 현실을 자주 이기죠.”
하지만 아무 기대 없이 들어선 공간에선 감각이 느슨해지고, 감동은 오히려 커진다. 그녀는 그날 마신 커피의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책 한 구절은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우리는 언제나, 돌아가려고 길을 잃는다.” - 어느 낡은 소설 중에서
여행의 감동은 ‘예상 밖의 틈’에서 피어난다
관광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비계획적 몰입(Spontaneous Immersion)’이라 부른다. 일정표가 틀어지는 순간, 감정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예상에서 벗어난 시간 속에서, 사람은 ‘여행자’로서의 본능을 회복한다.
“정보화된 명소보다, 우연히 마주한 공간에서 정서적 만족도가 더 높습니다.” 여행심리학자 김해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통제 불가능한 순간’이 주는 해방감 때문이에요. 계획된 일정은 안전하지만, 감정은 예측 불가능한 틈에서 살아납니다.”
계획이 틀어졌기에, 이야기가 시작됐다
김나연 씨는 그날 이후 유명한 장소 대신,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길을 일부러 걸었다. “기대가 없으니까, 실망도 없더라고요. 대신 ‘발견’이 생겨요. 내가 만든 길이라는 느낌이 좋았어요.”
두브로브니크의 붉은 지붕보다 오래 남은 건, 그 옆 골목의 바람 냄새와 삐걱거리는 나무문이었다. 사람도, 소리도, 목적도 없던 그 길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여행 중”임을 실감했다.
명소는 안전한 선택이지만, 여행은 때때로 틀어질 때 완성된다. 실망이 방향을 바꾸고, 방향 전환이 우연을 부른다. 그리고 그 우연이 -여행을 다시 여행답게 만든다.
※ 실재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하되, 일부 인물 및 상황은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