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고요한 초원의 아침, 검은 소 떼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칼렌진족 청년들은 날렵한 몸으로 목초지 위를 달린다. 그들의 생활은 늘 소와 함께이고, 영양 또한 소에서 나온다. 케냐의 전통 발효 음료 ‘무르식(Mursik)’은 그 독특한 증거다. 우유에 숯가루를 섞고, 필요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소의 피를 소량 섞어 만든다. 여행자 입맛에는 도전적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조상 대대로 이어진 건강음료. 이 한 잔에 유목의 생존 철학과 ‘달리는 민족’이 탄생한 배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과연, 피로 만들어진 이 우유 한 모금을 마실 용기가 있을까.
케냐 서부의 리프트밸리(Rift Valley)는 세계 장거리 육상 영웅들이 태어난 땅이다. 케냐의 칼렌진(Kalenjin)족, 특히 난디(Nandi) 사람들은 매년 올림픽과 세계 대회에서 금빛 트랙을 점령해왔다. 이 지역의 청년들이 어떻게 그토록 강인한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많은 이들은 전통 발효 음료 무르식(Mursik)을 언급한다.
무르식은 기본적으로 소의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다. 그러나 그 시작은 단순한 발효 우유가 아니다. 칼렌진족의 문화에서 소는 재산이고 생명이다. 때문에 고기를 자주 먹지 않는다. 대신 살아 있는 소의 목 정맥에서 약간의 피를 채취한다. 이는 소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으며, 몇 주 후면 회복된다. 이렇게 얻은 피는 끓여 응고단백질을 제거한 뒤 우유와 섞는다. 영양과 철분을 보충하기 위한 생존의 지혜다.
여기에 이 지역만의 특별한 공정이 더해진다. 전통 옹기 같은 ‘고르사(Gorsa)’ 그릇 내부를 뜨거운 뼈나 나무 조각으로 태워 그을리는데, 이 숯가루가 소독 작용과 함께 구수하고 스모키한 향을 더한다. 이후 우유를 부어 며칠에서 몇 주 동안 발효시키면, 회백색빛을 띤 독특한 음료가 탄생한다. 발효가 잘 된 무르식은 걸쭉하며, 약간의 신맛과 탄닌 같은 떫은맛, 그리고 미세한 숯 입자가 씹힌다.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당황스러운 풍미지만, 익숙해지면 중독성 있는 맛이라는 평가도 있다.
칼렌진족에게 무르식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삶의 상징이다. 결혼식, 장례식, 성인식 등 중요한 의례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이며,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고의 환대이기도 하다. 전통 사회에서 무르식을 마시는 행위는 공동체의 일원이 됨을 의미했다. 특히 사춘기 청년들에게는 근육과 체력을 기르는 힘의 원천이라 여겨졌고, 지금도 많은 육상 선수들이 경기 전 무르식을 즐긴다고 알려졌다.
이 음료가 여행자들에게 주는 충격 포인트는 분명하다. “피를 왜 넣는가?” 하지만 현지인의 시각에서 피는 오랜 생존 방식이자 소를 죽이지 않고도 소중한 영양을 얻는 지속 가능한 선택이다. 음식문화의 배경을 알게 되면, 혐오보다는 존중의 감정이 더 커진다.
무르식은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색 음식'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자리한 의미는 훨씬 깊다. 피와 우유, 그리고 발효라는 조합은 칼렌진족의 유목 역사와 생존 전략을 상징한다.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 혹독한 자연 환경 속에서, 그들은 소와 함께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다. 이 음료를 통해 그들은 지금도 세계 무대를 누비는 강인한 주자들을 키워내고 있다.
우리에게는 낯설고 도전적인 맛. 하지만 그들에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자부심의 풍미다. 여행은 결국, 자신과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무르식 한 모금에 담긴 이야기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맛’을 넘어 ‘삶’을 삼키게 된다. 오늘도 누군가는 초원의 바람 속에서, 이 흰색 음료 한 잔으로 새로운 경주를 준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