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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여행지–해외편⑳] 지도를 벗어난 깊이…러시아 콜라 초심도 시추공

인간이 땅에 남긴 가장 깊은 질문

[뉴스트래블=편집국] 러시아 북서부, 북극권 가까이 위치한 콜라 반도에는 지도에도 잘 표시되지 않는 장소가 하나 있다. 관광객을 부르는 표지판도, 기념관도 없다. 대신 녹슨 금속과 부서진 목재 사이, 물이 고인 땅 위에 작은 원형 철판 하나가 놓여 있다. 그 위에 분필처럼 남겨진 숫자. 12,226m. 이 숫자는 한때 인류가 땅속으로 내려간 가장 깊은 거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장소가 멈춰버린 시간의 깊이이기도 하다.

 

 

땅을 향한 냉전의 경쟁

콜라 초심도 시추공(SG-3)은 1970년, 소련이 시작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목표는 단순했다. 지각을 가능한 한 깊이까지 뚫어, 지구 내부의 구조를 직접 확인하는 것. 과학의 이름을 달았지만, 냉전의 그늘 아래 이 프로젝트는 미국의 심해 시추 경쟁에 대한 조용한 응답이기도 했다. 시추는 느렸고 집요했다. 매년 수백 미터를 내려가며 장비는 계속 교체됐고, 예상과 다른 지질 구조가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지하 7km 이후부터는 온도와 압력이 기존 계산을 벗어났고, 드릴은 자주 파손됐다. 그럼에도 시추는 멈추지 않았다.

 

12,226m라는 숫자가 남은 이유

1984년, 시추 깊이는 12,226m에 도달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심 기록이었다. 이 시점에 설치된 것이 바로 지금 남아 있는 금속 캡이다. 현장에는 그 숫자가 그대로 기록됐다. 이 표식은 ‘최종’이 아니라, 그 시점까지 인간이 도달한 가장 깊은 위치를 의미했다. 이후 시추는 계속됐다. 장비를 교체하고, 시추 각도를 조정하며, 땅의 저항을 우회했다. 그리고 1989년, 콜라 초심도 시추공은 12,262m에 도달한다.


이 숫자가 공식적인 최종 깊이다. 그러나 현장에는 그 숫자가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사진으로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12,226m다. 이 장소는 기록보다 먼저 멈췄고, 숫자는 시간 속에 고정됐다.

 

깊이가 남긴 예상 밖의 세계

콜라 초심도는 단순한 깊이 기록 이상의 결과를 남겼다. 지하 10km 이상에서도 암석 속에 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화석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던 깊이에서 미생물 흔적이 발견된 점, 그리고 지각이 생각보다 훨씬 뜨겁고 유연하다는 데이터들. 지하 12km 부근의 온도는 약 180도에 달했다. 장비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수준이었다. 결국 시추는 기술적 한계 앞에서 중단됐다. 땅이 인간에게 허락한 깊이는 거기까지였다.

 

여행지라 부르기 어려운 이유

콜라 초심도 시추공은 일반적인 의미의 여행지가 아니다. 접근도 어렵고, 내부로 내려갈 수도 없다. 지금은 폐쇄된 시설이며, 남아 있는 것은 봉인된 구멍과 숫자 하나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 ‘금단의 여행지’다. 사람이 직접 들어갈 수 없기에 더 강하게 상상하게 되는 장소, 인간이 닿지 못한 영역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여행은 이동이 아니라 거리의 인식이다. 지면 아래 12,262m.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얼마나 두껍고, 동시에 얼마나 낯선 공간인지에 대한 감각.

 

닫힌 구멍이 던지는 질문

콜라 초심도 시추공은 지금 봉인돼 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고, 다시 열 계획도 없다. 그러나 이 구멍은 닫힌 동시에 열려 있다. 인간이 어디까지 파고들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금속 캡 위의 12,226m라는 숫자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건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기록이 멈춘 지점이다. 최종 깊이인 12,262m보다 덜 깊지만, 기억 속에서는 가장 오래 남은 숫자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이곳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인간이 땅을 이해하려 했던 가장 깊은 시도가, 바로 여기까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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