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4 (수)

  • 맑음동두천 3.7℃
  • 맑음강릉 2.9℃
  • 맑음서울 5.4℃
  • 맑음대전 5.3℃
  • 맑음대구 6.4℃
  • 맑음울산 6.8℃
  • 맑음광주 7.0℃
  • 맑음부산 7.6℃
  • 맑음고창 2.7℃
  • 맑음제주 8.7℃
  • 맑음강화 3.8℃
  • 맑음보은 2.5℃
  • 맑음금산 3.0℃
  • 맑음강진군 5.2℃
  • 맑음경주시 5.8℃
  • 맑음거제 5.7℃
기상청 제공

[NT 기획①] 이탈리아가 질투할 반도, 이스트라

콜로세움보다 온전하다…2천 년을 버틴 풀라의 시간

[뉴스트래블=박주연 기자] 아드리아해 건너편에는 로마가 있다. 그러나 그 바다를 조금만 건너면 또 다른 로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크로아티아 북서부 이스트라 반도의 도시 풀라에는 2천 년 세월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거대한 원형경기장이 서 있다. 관광객의 셀카 명소라기보다 시민의 일상 공간에 가까운 이 건축물은, 로마 제국의 변방이 오히려 중심보다 더 온전하게 남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유적은 시간이 멈춘 장소가 아니다. 풀라 아레나는 지금도 공연이 열리고 영화제가 개최되는 ‘현재진행형 공간’이다. 돌로 지은 경기장은 더 이상 검투사의 함성 대신 음악과 박수를 품는다. 폐허가 아니라 생활 공간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곳이 특별한 이유다.

 

 

변방에 남은 중심

 

풀라는 고대 로마 시대 북아드리아 해역을 통제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원전 1세기, 제국은 이곳을 식민도시로 삼고 도로와 포럼, 신전을 세웠다. 그 상징이 바로 원형경기장이다. 로마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지만, 건축 규모와 완성도는 중심지에 뒤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변방’이었기에 더 오래 남았다. 로마가 수차례 전쟁과 개발을 거치며 구조를 잃어가는 동안, 풀라는 상대적으로 급격한 도시 확장을 피했다. 그 덕분에 고대의 윤곽이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중심이 사라진 자리에서, 변방은 오히려 중심의 시간을 보존했다.

 

돌 위에서 이어지는 현재

 

풀라 아레나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로마 원형경기장으로 알려져 있다. 장축 132미터, 단축 10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타원형 구조는 지금도 위압적이다. 무엇보다 외벽 네 개의 탑이 온전히 남아 있는 점은 다른 원형경기장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도리아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 건축 요소가 한 공간에 공존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곳의 진짜 힘은 보존 상태가 아니다. 여름이면 풀라 영화제가 열리고,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콘서트가 이어진다. 관객은 2천 년 전과 같은 돌 계단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유적을 박제하지 않고 사용하는 선택이, 역설적으로 이 공간을 더 오래 살게 했다.

 

로마 이후의 겹겹의 시간

 

풀라는 로마 이후에도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유고슬라비아를 거치며 다층적인 역사를 쌓아왔다. 구시가지 골목에는 서로 다른 제국의 건축 양식이 겹쳐 있다. 이탈리아와 닮은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결을 지닌 이유다.

 

아우구스투스 신전과 세르지우스 개선문은 로마의 흔적을 선명하게 남기지만, 도시 전체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여러 시대가 겹쳐진 풍경은 이곳을 단순한 ‘로마 유적 도시’가 아닌, 복합적 유럽의 축소판으로 만든다.

 

덜 알려진 유럽의 가치

 

유럽 여행은 종종 ‘이미 본 장면’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곤 한다. 로마의 콜로세움, 피렌체의 두오모,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처럼 익숙한 상징은 강력하지만 동시에 과밀하다. 풀라는 그 반대편에 있다. 덜 알려졌기에 더 여유롭고, 덜 소비되었기에 더 선명하다.

 

이곳에서 만나는 로마는 박물관 속 과거가 아니다. 지역 주민의 산책로이자 공연장이며, 아이들이 뛰노는 광장과 연결된 생활 공간이다. 이탈리아가 질투할 반도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로마의 시간을 가장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오히려 국경 밖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제국의 시간이 이렇게 살아 있다면, 이 땅의 식탁은 어떤 모습일까. 다음 편에서는 트러플 향이 감도는 숲과 올리브 오일이 흐르는 밭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스트라의 미식은 관광상품이 아니라 토양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포토·영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