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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르포] “비우는 삶, 채워지는 우정”… 수색초 43회가 춘천에 간 이유

1980년 졸업식이 남긴 마지막 숙제... 환갑 맞이 ‘해외 동행 프로젝트’ 닻 올렸다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지난 11일 이른 아침, 고양시 행신역 광장. 희끗한 머리칼 위로 쏟아지는 봄 햇살만큼이나 눈부신 웃음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1980년 서울 수색초등학교 교문을 나섰던 아이들이 46년 만에 다시 '수색초 43회'라는 이름표를 달고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어느덧 인생의 환갑(還甲)이라는 웅장한 고갯마루 앞에 선 이들의 손에는 이제 장난감 칼 대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스마트폰과 세월의 깊이가 담긴 따뜻한 눈빛이 들려 있었다. 행신역에서 시작된 이들의 발걸음은 춘천 소양강으로 이어지며 ‘관계의 생존’을 확인하는 한 편의 휴먼 다큐멘터리를 써 내려갔다.

 

 

◇ "직함이 사라진 자리, 46년을 건너온 마법의 애칭"

 

이날 춘천에 도착한 수색초 43회 동창생들은 소양강댐 정상길을 걷고 국내 최장 길이의 삼악산 호수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관광 코스는 대중적이었으나, 이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남달랐다. 사회에서 만난 관계 특유의 어색한 탐색전이나 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호칭이었다. 현장에서 '대표님'이나 '부장님' 같은 딱딱한 사회적 외투는 보이지 않았다. 명함에 새겨진 직함 대신 이름 자와 코흘리개 시절의 별명이 오가는 순간, 이들의 시간은 1980년 어느 봄날의 교실로 회귀했다. 스스럼없이 서로를 불러대던 정겨운 애칭들은 46년의 세월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모임을 이끄는 회장은 이 관계의 힘을 ‘무구함’에서 찾았다.

"우리는 서로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을 묻지 않습니다. 60평생을 살며 깨달은 건, 사회적 인연은 대개 역할이나 목적에 따라 맺어지지만 초등학교 친구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철없던 시절에 운명처럼 만난 이들이기에, 세상 그 누구보다 편하고 정이 깊습니다."

 

 

◇ 카톡으로 잇는 150명의 네트워크… ‘디지털 우정’의 모델

 

행신역 광장에서 보여준 일사불란한 결속력은 숫자로도 증명된다. 현재 공식적으로 단체 대화방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인원만 80여 명. 비공식적으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소통하는 인원까지 합치면 150여 명에 달한다.

 

모든 인연이 유지된 것은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누군가는 멀어지고 누군가는 잊혔다. 하지만 회장은 이를 '인생의 비우기 과정'이라 설명했다.

 

"나이가 들수록 관계는 확장보다 정제가 중요해집니다. 이제는 인생을 채우기보다 서서히 비워내야 하는 시기이기에, 끝까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과 나머지 여생을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 내년 환갑 프로젝트… "죽기 전 한 번은 더 보자"는 약속

 

이번 야유회의 핵심 화두는 단연 ‘내년 환갑 여행’이었다. 이들은 인생의 큰 마디인 환갑을 기념해 대만, 일본, 중국 또는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2박 3일 내지는 3박 4일 일정의 해외여행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행신역에서 출발하며 다진 결의는 춘천의 푸른 호수를 보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단순한 효도 관광이 아니라, 생의 하반기를 함께할 동반자로서의 결속을 다지는 ‘우정의 연장전’이다.

 

동창생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설레는 기대감이 터져 나왔다. 한 참석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며 "이번 기회에 연락이 닿지 않았던 친구들을 더 찾아내어,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마주하고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싶다"고 전했다.

 

 

◇ 관광을 넘어선 인연의 미학… "결국 누구와 걷느냐의 문제"

 

춘천의 명소들은 이들의 우정을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조연이었다. 케이블카 아래로 펼쳐진 의암호의 비경보다, 댐 정상길의 탁 트인 개방감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그 길 위를 나란히 걷는 친구들의 ‘뒷모습’이었다.

 

여행전문가들은 이러한 동창회 여행의 변화에 주목한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유흥 위주의 모임에서, 함께 걷고 대화하며 인생의 가치를 공유하는 ‘서사형 여행’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색초 43회의 행보는 중장년층에게 고독을 이겨내는 자발적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취재 후기]

행신역 광장에서 시작된 웃음소리는 소양강의 물줄기를 따라 한강으로 흐르고 있었다. 1980년에 멈춰있던 그들의 시간은 2026년 봄의 햇살 아래 다시금 활기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역 광장에서 나눈 짧은 인사가 내년 해외로 향하는 푸른 바다 위에서 터질 거대한 함성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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