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어둠이 내린 마닐라의 거리, 노란 가로등 아래에서 삶은 오리알 한 알이 손바닥에 올려진다. 필리핀의 밤을 상징하는 음식, 발룻이다. 껍질을 살짝 깨면 따뜻한 김이 오르고, 그 안엔 부리를 틔우기 직전의 오리 새끼가 누워 있다. 낯선 여행자는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침을 삼킨다. 반면 현지인들은 망설임 없이 소금을 톡 뿌리고 한입에 넣는다. 그들에게 발룻은 도전이 아니라 일상, 공포가 아니라 추억이다. 사람마다 익숙함의 기준이 다르듯, 음식에도 국경이 없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는 순간, 여행은 비로소 시작된다.
발룻은 부화 직전의 오리알을 삶아 먹는 필리핀의 전통 간식이다. 수정 후 약 17~21일 된 알을 삶아 껍질째 내놓는다. 껍질을 살짝 깨면 육수처럼 진한 국물이 흐르고, 노른자와 희미한 깃털이 섞인 오리 새끼가 드러난다. 식감은 부드럽지만 진한 풍미가 있고, 고소하면서도 철분이 가득한 맛이 혀에 남는다. 현지에서는 먼저 국물을 마시고, 노른자와 새끼를 함께 먹는 것이 ‘정석’이다. 생김새를 보는 순간 고개를 돌리는 외국인도 많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그게 바로 삶의 맛”이라며 미소를 짓는다.
발룻의 유래는 중국의 ‘마오단(毛蛋)’ 문화와 맞닿아 있다. 오리알을 반쯤 부화시켜 먹던 중국의 전통이 남쪽으로 전해져, 필리핀 기후와 식습관 속에서 현지화된 것이다. 스페인 식민 시기에도 발룻은 서민층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닭고기나 돼지고기를 구하기 어려운 시절, 오리알은 귀한 영양식이었다. 이후 거리 문화가 형성되면서, 발룻은 마치 한국의 ‘포장마차 오뎅’처럼 밤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발룻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생명관의 표현이다. 필리핀의 전통 신앙 ‘아니토(Anito)’는 모든 생명에 영혼이 깃든다고 믿는다. 삶과 죽음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다. 발룻을 먹는 행위는 죽음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일부를 다시 삶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에 가깝다. 서구권의 ‘먹을 수 없는 것’이라는 금기가 필리핀에선 오히려 자연의 이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현지 시장에서는 ‘17일 알이냐, 21일 알이냐’가 단골 화제다. 17일 알은 부드럽고, 21일 알은 형체가 뚜렷하다. ‘초보자는 16일, 마니아는 21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간장이나 식초, 고추, 마늘 소스를 곁들여 먹기도 하고, 지역마다 양념이 다르다. 일부 지역에서는 알을 손전등으로 비춰 알 속의 성장 정도를 살피며 고르기도 한다. 장인들은 “불빛 아래에서 생명을 본다”고 말한다.
최근엔 발룻이 관광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리얼리티 쇼에 등장하거나, ‘용기 테스트’로 SNS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현지인에게 낯설다. 그들에게 발룻은 자랑스러운 문화이자, 생존과 역사, 그리고 일상의 상징이다. “우린 단백질을 얻은 게 아니라, 삶을 나눈 거야.” 어느 마닐라 노점상 아저씨의 말은 그렇게 단순하고 깊다.
발룻은 두려움을 시험하는 음식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과 문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한 알의 철학이다. 삶과 죽음이 맞닿은 그 경계에서, 우리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배운다. 문화란 결국,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도전이 되는 그 차이를 이해하는 일이다. 발룻의 껍질을 깨는 순간, 세상의 기준도 함께 깨진다. 여행이란 바로 그런 순간을 마주하는 용기다. 냄새와 질감, 편견을 모두 넘어서서, 다른 이의 일상을 한입에 담는 것. 그건 혀가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맛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