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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맛 기획] 한입의 세계 ⑮ 스코틀랜드 해기스

고원의 질감, 가난이 만든 풍미의 역전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스코틀랜드의 고원지대, 안개와 비가 뒤섞인 풍경 속에서 태어난 음식이 있다. 이름은 ‘해기스(Haggis)’. 양의 내장에 귀리, 양파, 향신료를 넣어 푹 끓여 만든 요리로, 처음 듣는 사람은 종종 “정말 먹는 음식 맞아?”라고 묻는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이 해기스가 스코틀랜드 정체성의 상징이자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다. 매년 로버트 번스의 시를 낭독하며 해기스를 먹는 ‘번스 나이트’가 열리고, 식당마다 해기스를 테마로 한 메뉴가 따로 있을 정도다. 가난한 시절에 버려지던 재료로 만든 음식이 세월을 지나 스코틀랜드의 얼굴로 자리 잡은 셈이다. 시각적으로 화려하지 않고 조리법도 단순하지만, 첫 숟가락을 뜨면 놀랍도록 풍미가 깊고, 고원의 거친 기운이 입안에 은은하게 흐른다. 해기스는 한 나라의 역사와 생존의 지혜가 어떻게 ‘맛’으로 응축되는지를 보여주는 요리다.

 

 

해기스의 기원은 스코틀랜드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유럽 전역에서 동물의 내장을 이용한 요리는 흔했다. 유목민들은 사냥한 가축의 내장을 바로 활용해 영양을 보충했고, 북유럽에서도 내장 소시지가 일상 음식이었다. 하지만 해기스가 현재의 형태로 정착된 것은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의 생활 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거친 기후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동물의 모든 부위를 허투루 쓰지 않았고, 내장에 귀리와 향신료를 채워 삶아낸 방식은 ‘최소한으로 최대한을 얻기 위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해기스는 전통적으로 양의 위(stomach)에 양의 폐, 간, 심장 등 내장 부위를 잘게 다져 넣는다. 여기에 귀리, 양파, 후추, 소금, 향신료를 더해 풍미를 균형 있게 맞춘다. 이 혼합물을 양의 위 속에 채운 뒤 장시간 끓이면, 귀리가 내장의 육수를 흡수해 단단해지면서 고기처럼 씹히는 질감을 만든다. 내장은 삶으면서 특유의 텁텁함이 사라지고, 대신 구수한 고향의 맛 같은 풍미가 살아난다. 단순히 육류로 만든 소시지보다 더 깊고 복합적인 맛을 내는 이유다.

 

흔히 해기스를 “거친 음식”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질감은 놀랄 만큼 섬세하다. 잘 익은 해기스를 자르면 안에서 꾸덕하고 촉촉한 속재료가 흘러나온다. 귀리가 고소함을 더하고, 내장 특유의 감칠맛이 집중돼 있어 단 한 조각만 먹어도 풍미가 입 안에 오래 남는다. 스코틀랜드인들이 “때로는 소고기보다 해기스가 더 미식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기스를 먹는 전통적 방식은 ‘니프스 앤 태티스(Neaps and Tatties)’와 함께하는 것이다. 노란 순무 퓌레(니프스), 크리미한 감자 퓌레(태티스)를 곁들이면 풍미가 부드러워지고 내장 요리에 낯선 사람도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다. 버터와 육수, 흑후추가 어우러지는 스코틀랜드식 퓌레는 해기스의 농밀함을 훌륭히 받쳐주는 절묘한 조연이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한 잔이 더해지면 이 조합은 완성된다.

 

해기스의 위상은 ‘번스 나이트(Burns Night)’에서 절정에 이른다. 국민 시인 로버트 번스를 기리는 이 날, 사람들은 해기스에 칼을 넣기 전, 번스가 쓴 시 ‘To a Haggis’를 낭독한다. “위대한 내장의 왕이여!”라는 구절에서 객석은 웃음을 터뜨리고, 이어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해기스가 자리로 들어오는 ‘해기스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내장 요리에 대한 이토록 열렬한 환대는 스코틀랜드 외에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음식이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을 바치는 기둥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스코틀랜드의 가정과 선술집에서도 해기스는 꾸준히 사랑받는다. 전통 버전을 넘어서 최근에는 해기스 버거, 해기스 스프링롤, 해기스 피자까지 등장했다. 비건 재료로 만든 ‘베지 해기스’도 일상 메뉴로 자리 잡았다. 내장 대신 렌틸, 귀리, 버섯을 사용해 풍미는 유지하면서도 접근성을 넓힌 버전이다. 해기스는 여전히 진화 중이다.

 

여행자가 처음 해기스를 보면 낯설 수밖에 없다. ‘내장’이라는 단어, 양의 위라는 조리법이 주는 시각적 이미지 때문이지만, 한입 먹는 순간 편견이 무너진다. 고소하고 깊은 맛, 건강한 곡물의 향, 스튜와 고기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묵직한 풍미. 해기스는 생각보다 훨씬 친근한 음식이다. 바로 이 부드러운 진입성이 스코틀랜드인들이 자신 있게 여행자에게 해기스를 권하는 이유다.

 

해기스는 단순한 전통 요리가 아니다. 스코틀랜드의 자연환경, 가난했던 시절의 생존 방식, 공동체의 축제를 고스란히 품어낸 ‘문화적 아카이브’다. 내장이라는 재료가 주는 편견을 넘어 한입 맛보는 순간,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의 투박한 삶과 강인한 정신이 맛으로 전해진다. 해기스는 화려하진 않지만, 담백함과 깊이, 오래된 기술이 만든 풍부함이 있다. 여행자는 이 음식 한 접시로 스코틀랜드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또 다른 통로를 얻게 된다. 결국 해기스는 ‘낯선 맛이 주는 용기’가 괜찮은 선택임을 증명해주는 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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