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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 특집] 2025-2026 한국관광 100선 ④ 서울 5대 궁궐 – 창경궁

왕실의 시간이 머물던 궁

[뉴스트래블=편집국] 서울 종로구 창경궁로. 도심의 소음이 채 가라앉지 않은 거리 끝에서 홍화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궁궐은 예상보다 낮은 목소리로 시작된다. 장엄하게 치솟기보다 차분히 펼쳐지고, 과시하기보다 스며든다. 창경궁은 권력의 전면이 아니라, 왕실의 생활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1483년, 성종은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이 궁을 지었다. 창경궁의 출발은 정치적 상징이 아니라 효(孝)의 실천이었다. 왕조의 법궁이 국가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면, 창경궁은 왕실 어른들의 일상이 놓인 자리였다. 그래서 이 궁궐에는 의례의 긴장보다 생활의 결이 먼저 느껴진다.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 궁궐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히려 그 절제가 기품을 드러낸다. 기단 위에 단정히 올라선 전각, 마당에 놓인 품계석, 단청의 색감은 위엄을 말하되 과장하지 않는다. 명정전은 이 궁궐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준다. 권위는 있지만, 날카롭지 않다.

 

명정전을 지나 통명전과 양화당 일대로 들어가면 공간은 더욱 인간적인 표정을 드러낸다. 이곳은 대비와 왕비, 왕실 가족이 머물던 생활 공간이다. 마루와 처마, 창호의 구조는 실용을 우선한다. 궁궐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이곳은 그 권력이 나이를 먹고 숨을 고르던 자리다. 창경궁은 왕실의 노년과 일상을 품은 궁궐이다.

 

창경궁의 시간은 유난히 굴곡이 깊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됐고, 이후 재건됐지만 온전한 안정을 누리지는 못했다. 근대에 들어와 이 궁은 또 다른 변화를 겪는다. 1909년, 일제는 이곳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다. 왕실의 공간은 유원지로 전환됐다. 궁궐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전각 사이에 우리와 온실이 들어섰고, 궁궐은 산책과 오락의 공간으로 소비됐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궁 안에 자리한 대온실은 대한제국 시기 세워진 서양식 유리 건축물이다. 철골과 유리로 구성된 이 구조물은 전통 궁궐 건축과 대비를 이루며 묘한 긴장을 만든다. 상처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층위가 된 존재다.

 

 

광복 이후 창경궁은 다시 ‘궁’의 이름을 되찾았다. 동물원은 이전됐고, 훼손된 전각은 단계적으로 복원됐다. 그러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대온실은 남겨졌다. 창경궁은 상처를 지우기보다 기억하기로 한 공간이다.

 

이 궁궐의 또 다른 얼굴은 춘당지 일대에서 드러난다. 연못과 산책로가 이어지는 동선은 다른 궁궐과 다른 리듬을 만든다. 봄이면 벚꽃이 연못을 감싸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그늘을 만든다. 가을 단풍은 전각 지붕과 대비를 이루며 깊이를 더하고, 겨울의 설경은 궁궐을 고요하게 잠재운다. 창경궁은 사계절의 변화가 가장 또렷하게 체감되는 궁궐이다.

 

창경궁은 크기로 압도하지 않는다. 대신 머무르게 한다. 정전에서 생활 공간으로, 다시 연못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완만하다. 관람객은 어느 순간 ‘궁궐을 본다’기보다 ‘궁궐 안을 걷는다’는 감각에 가까워진다. 권력의 무대가 아니라, 시간이 머무는 장소로 인식되는 이유다.

 

서울의 다섯 궁궐 가운데 창경궁은 가장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다. 화려한 상징이나 거대한 규모 대신, 인간의 숨결과 역사적 흔적이 겹겹이 남아 있다. 왕실의 기쁨과 슬픔, 효의 정치, 식민의 상처, 그리고 복원의 의지가 한 공간에 포개져 있다.

 

궁궐은 흔히 위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창경궁은 다른 장면을 남긴다. 나이를 먹은 대비가 마루에 앉아 햇빛을 바라보던 시간, 병을 앓던 왕실 가족의 숨결, 그리고 근대의 굴곡을 견딘 전각의 그림자.

 

창경궁은 말한다.
궁궐은 권력만의 공간이 아니었다고.
그곳에는 사람이 살았고, 시간이 머물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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