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트래블=박민영 기자] 중국 후난성 창사시를 대표하는 악록산(岳麓山)은 흔히 유교 문화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송대부터 이어진 악록서원과 학문의 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산의 또 다른 얼굴은 비교적 조용히 숨어 있다. 악록산 풍경구 깊숙한 곳에 자리한 불교 석굴·불상군 ‘사굴만상(四窟万像)’이 그곳이다.

사굴만상은 이름 그대로 여러 개의 석굴과 수많은 불상을 한 공간에 집약한 불교 조형군이다. 바위를 파 만든 회랑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외부의 소음과 빛이 차단된 내부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은 규모보다 ‘밀도’다. 암벽을 가득 메운 좌불 군상과 벽면을 채운 벽화는 하나의 장면이라기보다, 불교 세계관 전체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석굴 내부의 대표적인 장면은 만불 군상이다. 동일한 자세의 작은 불상들이 반복적으로 배치돼 있는데, 개별 조각은 단순하지만 그 수가 만들어내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량함과 영원, 윤회의 개념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공간이라 할 만하다. 조형의 힘은 크기에서 나오기보다, 반복과 축적에서 나온다는 점을 이곳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회랑을 따라 더 들어가면 인간의 얼굴 조각들이 구조물을 떠받치고 있는 독특한 장면을 만난다. 표정은 제각각이다. 웃음과 고통, 무표정이 섞여 있으며, 하나같이 현실적이다. 이는 신의 세계보다 중생의 세계를 먼저 마주하게 만드는 장치처럼 보인다. 불상이 하늘을 향해 있다면, 이 얼굴들은 땅 위의 삶을 응시한다. 신앙과 인간, 이상과 현실이 한 공간에서 교차하는 지점이다.

사굴만상의 조형 양식은 당대 불교 미술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레산 대불을 비롯한 중국 불교 조형의 전통을 참고해 재현된 요소들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다만 이곳은 고대 석굴을 원형 그대로 보존한 유적이라기보다, 현대에 들어 복원과 재구성이 가미된 관광 유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 구성과 연출은 치밀하다. 조명은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고, 돌과 그림자의 질감을 살리는 데 집중한다.

악록산이라는 장소성도 사굴만상의 인상을 더욱 복합적으로 만든다. 유교의 산으로 알려진 공간 한켠에 불교 석굴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창사가 단일한 사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도시임을 보여준다. 학문과 신앙, 현실과 이상이 겹겹이 쌓인 도시의 성격이 이 작은 석굴 안에 응축돼 있다.

사굴만상은 화려한 랜드마크는 아니다. 그러나 천천히 걸으며 바라볼수록, 이곳은 ‘본다’기보다 ‘머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장소다. 악록산을 찾는 여행자라면, 서원과 전망대만 둘러보고 내려오기보다 바위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그곳에는 창사의 또 다른 시간이 조용히 흐르고 있다.







